봉숭아 꽃 물들이기

내 마음도 곱게 물들길

by 보리똥

시골 정원 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피어있던 봉숭아꽃. 오래된 나무일수록 뿌리를 감싸고 있는 가지는 굵고 실하다. 그러나 굵어 보이는 몸통에 비해 유독 뿌리를 약하게 내리는 꽃이 봉숭아다. 어린아이가 한 손으로 봉숭아를 뽑으려고 하면 쉽게 뽑힐 정도다. 덕분인지 봉숭아는 번식력이 좋다. 땅 주인장인 흙이 허락한다면 언제든 뿌리를 내리고 서식하는 습성이 있다.


붉은색, 분홍색 봉숭아꽃이 만발한 9월의 어느 날. 마당 한가득 봉숭아 꽃이 피어있었다. 밋밋한 손가락에 쨍한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싶어서 봉숭아꽃 주위를 자꾸 맴돌았다. 이내 활짝 핀 꽃과 초록색 잎사귀를 바구니에 따서 넣었다. 엄마가 그러는데 꽃뿐만 아니라 잎사귀를 섞어 넣어야 고운 색깔로 물들 수 있다고 했다.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는 어느새 꽃으로 가득 찼다. 열 손가락을 다 물들이고도 남을 양이라 발가락 열개까지 물들여도 될 것 같았다. 나, 동생, 엄마, 언니가 함께 물들이려면 따다 놓은 것 전부를 곱게 빻아야 했다. 신발 장안에는 꼬깃해지고 너덜 해진 작은 비닐봉지 안에 하얀 백반 덩어리가 담겨있다. 오래전부터 봉숭아에 백반을 넣어야 봉숭아가 선명하게 물들 수 있다고 했다. 집에 예쁜 매니큐어가 없던 시절, 손에 물든 봉숭아꽃은 멋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봉숭아는 저녁밥을 먹고 난 이후 잠들기 전에 물들이는 게 좋다. 봉숭아를 바르고 자고 일어나면 산타클로스가 다녀간 것처럼 뿅 하고 신기한 일이 생기는 걸 볼 수 있었다. 봉숭아를 물들일 생각에 밥도 대충대충, 양치질도 대충하고 다들 마루에 모여 앉았다. 논이 많은 시골은 아직도 모기가 극성이라 초록색 모기향 냄새가 방이고 마루며 가득 찼다. 모기향은 모기를 쫓기 위해 피어놓은 건데 나는 모기향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꿉꿉하고 구수한 우리들 발 냄새보다 모기향 냄새가 더 향기롭게 느껴졌다고 하면 믿어질까. 그 시절은 그랬다.


집에 뒹구는 검정 비닐봉지와 실타래를 가져왔다. 검정 비닐봉지는 우리들 손톱을 감쌀 수 있는 양으로 알맞게 재단했다. 이윽고 실을 가위로 잘라 준비한 뒤 빻아놓은 봉숭아를 손톱 위에 올렸다. 손톱 위에 얹힌 봉숭아들이 하얀 손톱을 곱게 물들어줄 것이다. 이윽고 준비해놓은 비닐을 봉숭아를 사이에 두고 둥글게 감싼다. 그리고는 비닐이 빠지지 않게 실로 칭칭 감아준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이 모두 봉숭아를 품고 있다. 손가락이 감아놓은 봉숭아로 잠드는 게 조금 불편했지만, 오늘 밤만 참으면 될 일이다.


자꾸만 새벽에 잠이 깼다. 무언가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유에서다. 더 고운 색을 내라고 덩어리째 백반을 넣은 것도 모자라 감아놓은 비닐이 빠진다고 실로 강하게 감은 탓에 손가락이 아프다 못해 욱신거렸다. 아니 손가락 마디가 아리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두 시간만 자고 일어나면 누구보다 진한 봉숭아 물이 손톱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다.


드디어 아침이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손가락에 감겨있던 비닐을 쏙쏙 빼냈고, 이내 새빨갛게 물든 손톱이 나타났다. 손톱에 물드는 것도 모자라 손가락 피부 절반이 붉게 물들었다. 붉은 게 정도가 심해 검게 보일 정도였다. 이미 동생은 손가락이 아파 새벽에 비닐을 벗겨내서 마치 김치찌개 국물과 비슷한 색깔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내 손가락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았다.

"요즘 누가 촌스럽게 시커멓게 물들이냐. 이런 촌띠기."

뭐든 과하면 촌스럽다는 소리를 듣는법이다. 나만 예쁘면 그만이지뭐. 하지만 문제는 손가락을 감싸고 있던 피부까지 물들어있다는 건데, 비누거품을 내고 따뜻한 물로 씻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고추장 항아리에 손가락을 반쯤 담그고 뺀 모습이랄까. 친구들이 내 모습을 본다면 놀림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내년에는 꼭 새벽에 비닐을 벗겨내야지.' 맹세했지만, 해마다 내 손톱은 붉다 못해 검은색이 돼버렸다.

인내심 약한 내가 봉숭아 물들이기에는 빛 날정도로 가장 큰 참을성을 보였던 그 시절.

다섯 살 우리 아이들도 봉숭아 물들이기에 나섰다. 백반을 적당히 넣고 랩을 잘라서 검정실로 돌돌 감아줬더니 다들 신기해하는 눈치다. "엄마 이게 뭐예요? 색깔 나와?" 한 10여분 지났을까. 너도나도 손가락이 답답하다며 풀어달라고 야단이다. 10분이면 정말 김치 국물 색깔인 연한 주황이 나온다. 이건 붉은색도 아니요, 누가 봐도 김치 국물 색깔이다. 그래도 하얀 손톱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비닐을 벗겨본다. 작고 통통한 손가락에 제법 예쁜 주황색 물이 들었다. "색깔이 가 정말 아름다워." 아이들은 연신 같은 말을 되뇌었다.


지금보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 손톱이 자라서 쨍하게 물들었던 봉숭아 물도 이내 조금씩 사라진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봉숭아꽃을 다시 볼 수 있지만, 어느새 나는 엄마만큼 큰 어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릴 때도 잘 참았던 칭칭 감긴 실을 참을 정도로 강해지지도 않았으며 어쩌면 시절보다 더 나약한 어른이 되어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시절을 그리워하며, 글을 쓰고 있는 어른이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봉숭아 꽃이 잔뜩 피어있는 앞마당, 파란 하늘, 평화롭게 떠다니는 잠자리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때로는 바람과 함께 흔들리다가 이내 코끝을 스쳐지나간다. 봉숭아 꽃으로 밋밋한 손톱에 예쁜 물이 드는 것처럼, 삶에 지친 내 마음도 곱게 물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