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면 니트류를 좋아해서 동대문에 갈 때마다 니트 전문매장은 꼭 들른다. 니트는 소재 특성상 피부에 닿을 때 까칠한 느낌이 들어 나시나 면 티셔츠를 함께 입어야 하는 것도 있고, 그냥 입어도 촉감이 부드러운 것도 있다. 도매시장에 가면 니트 전문매장이 많은데 파스텔톤부터 시작해 쨍한 빨강, 초록, 파랑 등 다양한 색상들이 "나 예쁘지?" 하듯 상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니트는 몸에 밀착되는 것보다 차르르 흘러서 니트 스스로 체형을 잡아주는 넉넉한 크기가 좋았다.
마른 사람은 마른 사람대로 느슨해 보이는 느낌이 예뻤고, 통통한 손님도 니트를 좋아했다. 하지만 99 사이즈였던 단골손님에게 니트 옷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내가 사입해 오는 옷 대부분이 아이보리나 베이지색이었는데 손님은 옷을 입어보고는 더 뚱뚱해 보이는 것 같다며 실망하는 눈치였다. 다음번에 동대문에 갈 때는 손님에게 어울리는 옷을 사입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동대문에 가기 위해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하얀 눈이 펑펑 내렸다. 라디오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렸고, 눈송이들은 음악에 맞춰 춤추는 천사 같았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창밖에 흩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호로록 마셨다. 하얀 눈송이가 작은 컵 안에 담겨 입안 가득 부드러움을 선물해줬다. 눈 내리는 저녁, 하루 중 가장 큰 사치를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단골이 원하는 옷을 기록한 수첩을 들고 동대문 상가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지갑에는 현금 백만 원이 있었지만 겨울옷은 단가가 꽤 나가기 때문에 다양한 옷을 사입하는 게 어려웠다. 외투 몇 벌, 티셔츠, 바지 몇 장이면 사입은 대충 마무리가 된다. 아무리 예쁜 옷이 많다 한 들 여유가 없는 장사꾼은 늘 머릿속이 복잡하다. 대봉투에 옷을 잔뜩 넣고 다니는 소위 '잘 나가는 옷가게 사장들'이 보인다. '나도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여유 있게 사고 싶은 옷을 맘껏 살 수 있는 옷가게 사장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동대문 상가를 한참 돌아다니다 보니 니트 전문점이 보였다. 티셔츠, 카디건, 원피스 등 니트를 활용한 다양한 옷이 즐비했다. 형형색색 예쁜 니트에 감동한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상인에게 다가가 단가를 물었다. 니트가 짜임새 있고 부드러운 소재일수록 비쌌다. 카디건은 한 겨울에도 머플러와 함께 매치하면 괜찮을 정도로 도톰해 보이는 옷도 있었다. 예쁜 옷을 보는 순간, 99 사이즈 단골손님의 실망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 가게에서 단골손님이 만족할 만한 니트를 골라야 했다. 나는 옷가게 사장인 동시에 누군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녀가 기뻐할 옷을 골라 선물하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어울리는 옷을 입고 행복해하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마침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폴라티가 눈에 띄었다. 너무 두껍지 않고 목을 느슨하게 감싸 그 어떤 옷보다 답답하지 않고 포근하게 느껴질 옷이다. 오트밀과 옅은 회색 티셔츠가 괜찮았는데, 오트밀은 아이보리를 좋아했던 그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히터가 빵빵했던 동대문 상가를 빠져나오자 차가운 칼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꼈지만 그렇다고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지금은 새벽 2시, 이제부터 한 시간 정도 여유가 남았다. 여유자금 50만 원. 이 돈으로 중년 여성에게 어울릴만한 바지와 조끼, 머플러를 골라야 했다. 마지막으로 고른 몇 장의 머플러 중 허전했던 내 목에도 머플러를 둘렀다. 갓 나온 쌀밥을 입안에 넣을 때처럼 따뜻한 온기가 목 안에 전해졌다. 오천 원짜리 머플러가 주는 온기치고는 참 따뜻했다.
나는 종종 니트 옷을 볼 때마다 니트를 좋아했던 99 사이즈 단골손님을 떠올린다. '그녀라면 이 옷을 좋아했을 텐데, 이 옷을 입었으면 참 예뻤을 텐데...' 라며 종종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녀는 니트를 좋아했던 만큼 마음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배 농사를 지었던 그녀는 겨울이면 저장해 놓은 커다란 배를 내게 선물했다. 그녀가 가져온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느껴지는 시원 달콤함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겨울철 동대문에서 갓 사입한 따뜻한 폴라 니트 셔츠를 선물하고 기뻐하는 모습에서 주인장은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는 사실을. 니트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씀이 따뜻하다는 사실까지도. 문득 예쁜 니트티를 보며 그녀가 떠오르는 12월의 겨울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