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가능하면 ‘저자’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책은 평론가적 작품이다. 저자의 시선에 눈을 맞출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저자와 내가 다름을 앎인 것이다.
책에서는 ‘삶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아는 것에 아는 것.
철학, 시, 문학 등 흉내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텍스트를 읽을 때 정직했는가. 그래야 텍스트를 쓸 때 정직할 수 있다고 본다. 장자는 ‘경전’ 동양문학권에서 압도적인 작품이다. 시집도 최소 열편을 읽어야 한 권의 시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의 시를 쓰는 저자가 한 사람의 호흡과 느낌과 결이 나왔는지 아니면 열편의 시를 조합해놓은 시가 나온 것 같은 작품인지를 간파해야 한다.
우리는 인문학자이기에 ‘분열된 사고로써의 독자’로 읽혀내야 한다.
1. 장자의 나비꿈 (소요유)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중국)로 장사를 갔지만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트랜스 레이션. 문맥을 어떻게 잡느냐다. 어떤 자리에 글을 두느냐에 따라 문맥을 달라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느 장소에 있느냐에 따라 공주가 되기도 하고 하녀가 되기도 한다.
송나라는 아주 보수적인 나라다. 장자는 송나라 출신이다. 한비자 ‘수주대토’ (기둥을 지켜 토끼를 지킨다) 한비자도 송나라 출신. 제자백가에 대한 송나라 사람들은 단순하다. 여기서 ‘장자’는 송나라 사람이란 것. 송나라 사람이라 이런 우화가 나온 것이다.
전쟁을 통해 통일 하면서, 원숭이 악어 등등에 관한 유화가 등장한다. 인간의 본능은 계급화하려한다. 문화는 옷으로 신분을 구분하려 한다. 원시부족은 ‘문신’을 한다는 것이다. 문신은 신분 변동이 없다는 뜻이며, 송나라 (모자를 썼던 장보) 가 원시부족을 만나 모자를 팔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뜻하는가?
송나라 사람이 월나라 사람을 알고 있다면 장사를 갔을까? 송나라 사람이 되었어야 모자를 팔수 있었을 것이다. 장자 내편 외편 좌편중 외편에 ‘추수’편에 ‘우물안 개구리’를 말하는데, 송나라 사람들이 ‘우물안 개구리’,‘식견’ 임을 증명하려 말하려는 우화일까?
송나라 사람들이 섣불리 어리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송나라의 사정만 알고 있는 상태. 송나라와 월나라 상황을 아는 (신적인 시선, 포괄적 시선)을 가지길 바라면서 쓴 장자의 글이다.
월나라의 신분계급은 ‘문신’이었고, 송나라의 신분계급은 ‘모자’였음으로 – 상인이 상인이 될 수 없는 망연자실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는 자아동일성이 와해될 때 일어난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지점. 모순을 통과하는 지점에 있다. 이를 ‘분석철학’이라 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철학이라고도 부른다.
결단의 지점. 모순의 지점. 그 지점에서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정직한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에 비유할 수 있다. 자신의 감각에 대한 규정. 어떻게 해야 할까?
송나라 상인이 본 것은 ‘타자’‘차이’였다. ‘선입견’을 비판하려는 장자의 가르침이다. 우리 자아동일성이 해체될 때. 상인이면서 상인이 아닌 것. 유령처럼 자신을 어리석게 보이게 한다. 우리는 어떤가?어떤 나라나 도시에 정착했을 때, 어리둥절한 그 기분.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그 ‘전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었는지 말이다.
장주의 꿈 나비의 꿈. 중요한 것은 장주와 나비를 ‘구분’을 만들어주는 건 뭘까?를 체크해보자.
구분되었을 때. 모순의 지점에서 오는 당혹스러움은 당연하다. 그런데 장주와 나비는 ‘물화’라고 표현된다면. 구분이 되고, 아닌 지점 둘을 경험하는 데에 있다.
자유로운 사람은 그 경계선상안에 있다.
그래서 장주가 되었다가 나비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아이를 만났을 때 아이가 되고, 어른을 만났을 때 어른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 장주의 가르침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타자와의 긍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