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나와 평소에 친분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경력 단절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것,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글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글쓰기 수업을 수강하기 시작한 건 3년 전쯤 겨울이었다.
여섯 명의 초면인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글을 읽고 합평하는 아주 낯선 수업이었다.
첫 번째 글쓰기 수업 과제는 글을 쓸 시간, 공간 그리고 왜 쓰고 싶은가에 대해 적는 것이었다. 육아 때문에 글을 쓸 시간이 넉넉지 않다는 핑계를 먼저 적었다. 스타벅스에 가서 한껏 폼을 잡고 싶지만 매일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장난감이 가득한 집에서 애써 공간을 찾았다.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신혼 때 산 2인용 식탁을 베란다에서 방 한쪽에 옮겼다. 연필꽂이, 작은 행운목을 놓고 노트북을 올려놓았다. 왜 쓰고 싶은지는 선명하지 않았다. 일단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을 꺼내서 보고 싶었다.
두 번째 과제는 ‘내 시선이 가는 곳’이었다.
내 눈이 유독 응시하는 곳, 그러니까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찬찬히 살펴야 했다. 1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를 추모하는 글을 썼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살아갔지만 60대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면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잘 생긴 남자보다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에 눈이 가는 나에 대해 썼다. 분필을 그리워하는 내가 보였다. 한글 문서가 오랜 친구인양 과거의 기억과 감정들을 쏟아냈다.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는 방 한쪽 구석 2인용 책상에서 나는 꽤 몰입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제출하고 합평을 들었다. 대학 때 쓰던 다이어리 이후로 처음 쓰는 글이니 더디고 명료하지 않았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을 부리면 문장이 겉멋 든 날라리처럼 붕 떴다. 속옷만 입은 기분으로 솔직하게 쓰자니 부끄러워 얇은 겉옷을 걸친 듯한 글을 쓰기도 했다.
3개월 과정을 듣고 문화센터 교양 수업처럼 탈탈 손을 털려고 했다. 교양이란 순식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사치라 여겨지는 순간이 많으니까.
그런데 깔끔하게 털어지지가 않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몰입하는 시간이 좋았다. 더 쓴다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글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쾌감을 느꼈다.
더 써보고 싶었다.
쓰면서 나와 나를 둘러싼 상황을 섬세하게 관찰하게 됐다. 스쳐 갔던 사람들과의 대화, 그 뒤에 숨겨진 의도, 나의 모순을 발견하는 일들이 흥미로워졌다. 글발이 부족하니 논문을 찾고 EBS 방송, 유명한 작가의 말을 인용하던 나는 점점 특별하지 않아도 나의 이야기를 쓰려고 애썼다.
6개월 뒤
불편하게 마음에 걸리는 일에 대해 써야 할 것 같았다. 아이에게 화살을 돌리려던 나는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와 시각을 내가 쓴 글에서 발견하고 꽤 충격을 받았다. 글을 쓴다는 것이 나를 까발리는 일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나는 그때 쓰는 일을 멈췄을지도 모른다.
1년 뒤
계속 쓰는 데 집중했다.
월요일이면 마감하는 기자처럼 어떻게든 수업에 낼 글을 올렸다.
길고 복잡했던 문장들은 조금씩 간결해졌다. 수미쌍관의 기술을 쓰며 어느 정도 글 한 편의 구도를 갖추게 되었다. 내 글이 다른 이에게 닿는다면 어떨까 상상하게 되었다.
2년 뒤
여전히 적확한 어휘를 쓰는 일에 실패하고 문장 간의 논리와 글의 주제에서 흔들리는 일이 허다하다. 더 좋은 글을 쓰지 못해서가 아니라 강제로라도 내 속내를 알아내야 하니 불편하다. 적당히 분위기만 피우며 쓰면 여실히 드러났다.
나와 글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를 응시할 때 나는 괴로워진다.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부족해도 지금 자기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실패하면서 조금씩 나아진다는 점에서 나는 글쓰기가 좋다.”
은유 작가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글 속의 내가 거울에 반사되는 상황을 맞닥뜨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 지점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여야 했다.
내 삶과 동떨어진 글을 쓰며 글 쓰는 날라리가 되기에는 다른 할 일이 많았다.
왜 쓰고 있는지를 자주 돌아봐야 했다. 어떻게 쓸지에 대한 고민도 커졌다.
3년 뒤
내가 합평에서 자주 받는 지적은 문장들을 던지고 도망을 자주 간다는 것이다.
더 촘촘하게 매듭을 연결하지 못한 채 헐겁게 놓는다. 사삭스럽고 말 많은 게 싫어 깔끔하게 글 한 편을 만든답시고 해야 할 말을 가볍게 덮어버린다. 적당히 좋은 말로 뭉뚱그리려다 딱 걸린다. 문장의 비논리가 곧 내 생각의 모순이었다.
현재로서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도망치지 않기 위한 훈련이다.
내가 쓴 문장들이 서로 간에 단단히 연결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내가 글 속에 던진 본질은 물고 늘어질 수 있도록, 궁극적으로 내가 부딪히는 문제들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나는 글 속에서 자주 실패하고 다시 보고 또 실패하고 나아가는 경험을 반복했다.
말은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지만 다행히 글은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퇴고라는 과정을 거치면 완전히 변신할 수 있었다. 고치지 않는 글, 다듬은 흔적이 없는 글은 불량생두를 골라내지 않고 로스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커피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그렇게 구운 커피의 맛과 향은 마시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질테다.
퇴고한 글이 천천히 발효되는 동안 나의 생각도, 시선도 나도 과거로부터 조금씩 방향을 틀었다.
내시경 카메라로 염증이 있는지 안을 샅샅이 훑듯 나를 그렇게 뚫어지게 내다보고 더 집요하게, 진실하게 나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길 중의 하나가 글을 쓰는 작업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쓸 수 있다면 언젠가 나를 넘어서 타인에게 닿는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