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때 엄마를 따라 에어로빅 수업에 들어갔다. 요란한 소리도 뚫고 나오는 걸걸한 목소리의 에어로빅 선생님, 선생님 못지않은 포스와 기운으로 선생님을 조력하는 회원들의 기합. 처음엔 어색했지만 나도 소심하게 ‘어이’하고 소리를 질러본 적이 있다. 음악 소리가 워낙 커서 누가 나인지 모를 테니 어설픈 기합 소리라도 낼 수 있었다.
두 번째 기합은 '준비, 태권!'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미녀 테니스 선수 샤라포바를 동경하며 테니스를 배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엄마는 냉정한 현실을 전했다. 네 운동 실력으로 테니스는 어림도 없다고. 그러더니 나를 태권도장으로 끌고 갔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엄마가 용돈을 안 준다고 협박하니 그냥 따라가 보기만 하자는 마음이었다. 나는 창피해서 상담실 한쪽 모퉁이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엄마가 도장을 나오면서 말했다.
“관장님, 우리 딸 잘 부탁드려요."
며칠 뒤 나는 어느새 뭔가에 홀린 듯 아디다스 도복을 입고 있었다.
10살, 12살 아이들은 나를 누나라고 부르며 따라다녔다. 꼬마들과 같이 다리 찢기를 하고 겨루기를 했다. 쪽팔린다는 생각은 점점 누그러지고 나는 태극 1장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손끝에 정확히 힘을 주고 하나하나 동작을 충실히 해야 하는 태극 품새, 정신까지 집중해서 손 끝에 힘을 모아 하는 격파, 빨간색 헤드기어를 쓴 나보다 키는 작지만 방심하면 내 머리 위로 돌려차기를 날리는 파란색 헤드기어 상대와 겨루기.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는 천천히 태권도를 익혔다.
관장님은 어느 날 양손에 미트를 넣더니 발차기 연습을 하자고 했다.
기합을 넣으며 빠르게 발차기를 하라고 했다. 발차기를 해봤더니 뻥뻥 소리가 났다. 기합을 넣는 일이 처음엔 숨이 차고 힘들었다. 발차기를 할수록 잘 맞을 땐 천정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기합과 몸이 호흡을 맞추면 둘은 서로를 도왔다. 새로운 기분이었다.
체육 시간엔 뒤에서 일이 등을 도맡아 하던 나였다.
마흔이 다 되도록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건 아마 그날이 전환점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미트를 차던 그날 내가 느꼈던 전율을 잊지 못한다. 내 몸에 전해지는 짜릿한 전기가 뇌까지 전달되는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는 일에 주눅 들어 있었던 한 소녀는 가슴을 펴고 기합을 넣고 태극기가 새겨진 도복 위에 검은 띠를 묶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검은 띠를 엄마가 상기시켰다.
“딸, 엄마 오늘 어디 갔다 왔는 줄 알아?”
“어디 갔는데?”
“엄마의 버킷 리스트 실행하러!”
“설마 태권도?”
그제야 떠올랐다. 엄마는 어렸을 때 도장이 집 근처에 있었는데 비싸서 못 다녔다고 했다. 엄마가 기어이 버킷리스트 1번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여자 사범님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50대 관장님이 운영하는 곳인데 맞은편 태권도장보다 규모가 작고 정통 태권도에 가깝다고 했다.
엄마는 오후 5시가 넘으면 전화통화도 안 한다. 6시 수업이니 준비하고 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태권!”
꼬마들은 엄마를 보면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엄마는 나이 든 아줌마가 수업에 들어가니 아이들한테 미안하다고 음료수와 초콜릿을 번갈아 사 간다. 사범님은 한 달 안에 이렇게 많은 걸 배운 분은 못 봤다고 혀를 내둘렀다.
엄마가 태권도를 배운 지 한 달이 지났다.
“엄마는 그때가 눈에 선해. 너 국기원 가서 심사받은 날 있잖아. 네가 옆차기를 하고 품새 할 때 엄마는 가슴이 설레고 좋았다. 우리 손주들도 태권도했으면 좋겠다. 삼대가 같이 말이야.”
“3대? 크크, 엄마. 내 나이가 몇인데 태권도를 다시 해.”
‘미안한데 난 아니야 엄마!’
삼대가 모여 태권도복을 입고 사진 찍는 게 엄마의 새로운 버킷 리스트라고 하면 어떡하나. 진짜 내가 애들하고 같이 태권도장에 다니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 말은 거절을 못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불안해진다.
나에게 기합을 넣는 일은 어떤 결과를 위해서라기보다 오로지 그 순간에 집중하려는 노력이었다.
온갖 소음과 잡다한 일들에서 벗어나 땀 흘리며 나의 에너지를 모아보는 시간이었다. 목이 아니라 배에서 기운을 끌어올려 소리를 내 보고 나는 누구도 줄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건져냈다.
다시 도복을 입고 세 번째 기합을 넣는 나를 상상해본다.
머리를 높게 묶고 검은 띠를 허리에 단단하게 매고 옆차기를 하는 모습을. 돌려차기는 기합을 많이 넣어도 안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