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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Dec 07. 2022

사소한 따뜻함

밝은 밤 - 최은영

 때로는 어설픈 말보다 함께 먹는 밥이 위로가 된다고 느낄 때가 있다.



『밝은 밤』 속 주인공 지연이 할머니와 함께 밥을 먹는 장면이 그랬다. 구운 박대, 물미역과 초고추장, 무조림, 밤과 강낭콩을 넣은 밥과 결명자차. 할머니가 거의 사용하지 않은 듯한 사인용 밥상에 내온 밥과 반찬들이었다. 지연은 그날 오랜만에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꼈고 할머니와 함께 먹는 밥이 맛있게 느껴졌다. 


나는 지연이 할머니 집에 처음 방문한 날의 그 장면이 좋았다. 건조하고 외로웠던 그들의 일상이 그날을 시작으로 달라질지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을까.


사실 할머니와 그녀는 잃어버린 20년을 보낸 사이다. 어색함과 난감함이 교차하는 둘 사이의 공기를 그들은 아주 천천히 순환시킨다. 서로에게 속내를 다 드러내면서까지 치대는 사이를 원하지 않았던 남편과의 관계와는 조금 다른 각도로.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온전히 내 편을 들어줄 것만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지연은 천문대의 연구원이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희령이라는 도시로 떠난다. 언제든 마음먹으면 바다를 볼 수 있는 작은 도시로. 어렸을 때 여름 냄새로 기억되는 할머니 집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난다. 


번호를 알려달라면서 연락은 안 할 거라는, 시간 될 때 한 번 놀러 오라면서 바쁘면 절대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는, 밥상에 수저를 놓으려는 손녀에게 대접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며 손을 젓는 귀엽고 세련된 할머니를. 




소설은 이야기 속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할머니 집 작은 방에 놓은 박스 속에 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증조모와 그녀의 친구 새비 아줌마가 주고받은 편지에 지연과 꼭 닮은 증조모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백정의 자식이라고 모두가 외면하는 증조모 삼천이를 새비 아줌마는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않는다. 전쟁통에서도, 고통 속에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고 마음을 나눈다. 새비 아저씨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가부장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주변 여성들을 존중하는 합리적인 남자로 등장한다. 이 부부는 증조모, 증조부에게 영혼의 은인이다.


굴곡진 삶을 살면서도 강인하고 호기심이 많았던 백정의 딸 증조모,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남편과 아버지를 견디며 혼자 딸을 키운 할머니, 진짜 끝날까 봐 자신의 딸과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엄마, 껍데기를 붙들고 자신을 다그치며 살아왔던 소설 속 나.


이렇게 4대에 걸친 모녀들의 관계는 얽히고 얽혀 서로를 만나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한다.

그녀들은 모두 각자의 아픔을 지녔다.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그 좋은 사람이 다른 이에겐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지연을 위로한다.

그녀의 절친인 지우는 바람피운 남편을 개새끼라고 시원하게 욕한다. 

할머니는 그녀를 판단하지 않는다. ‘라테는 말이야’하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평소에 예의 바르고 사적인 얘기는 잘하지 않는 동료는 자신의 틈을 조금 내보인다. 

편지 속 대비 아줌마와 아저씨가 건네는 따뜻한 눈빛과 온전한 이해, 사람에게 치대지 않는 고양이 같은 명주 할머니의 깊은 사랑은 저 먼 우주에서 괜찮다고 도닥거리며 카톡을 보낼 것만 같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P. 14     


지연의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른 것 같아 흐뭇했다. 

‘사소한 따뜻함’들이 모여 지연이 자신의 상처를 오롯이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문학은 가슴에 저장해두었다가 내 삶에 필요한 어느 순간에 꺼내쓸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 작품을 읽고 스며든 온기가 나에게 스며들어 오래 머물기를 희망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은 어둠의 정체를 몰라 두렵다. 

여전히 어두워도 어둠의 형체를 알게 된 밤은 환해질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밝은 밤’ 이리라.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을 알아차린 지연의 밤처럼. 작은 일에 감탄할 수 있는 아이를 보며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풍요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할머니의 희망처럼.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여자가 내 어깨에 기대 조금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처럼.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밝은 밤을 위한 한 줄기 빛을 비춰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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