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점이 아니라 시골의 한옥 구석이었다. 그곳은 한옥을 개조한 태권도장이었다. 도장을 다니기엔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8남매 중에 넷째, 딸 중엔 첫째. 소녀는 멀리서 쭈그려 앉아 보고 또 봤다. 사범님의 멋진 발차기를. 여러 명의 힘찬 기압 소리가 메아리처럼 귀에 울렸다.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을까. 그 소녀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압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고 싶었다.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었다. 간절했던 마음이 수십 년 동안 마음 한편에 웅크리고 있었으니까.
짱 태권도는 어느덧 중년이 된 소녀의 마음을 받아준 곳이다.
어떤 테스트도, 판단도 없이. 관장님은 그저 가능하다는 말 한마디로만 답했다.
40대 선수 출신 남자 관장님 한 분, 경력이 10년도 넘는 여자 사범님이 한 분 계신다고 했다. 한 타임에 아이들이 10명 남짓이었다.
손주들은 외할머니가 다니는 도장에 따라가 본 적이 있다.
“엄마, 한미(할머니)가 다니는 도장은 노는 시간이 별로 없어.”
“그래? 너희 태권도랑 달라?”
“응. 우리는 품새 10분 정도하고 피구랑 게임 많이 해. 근데 짱 태권도는 한 시간 내내 품새 하고 미트 발차기하더라. 수업 끝나고 형들이랑 축구하고 놀았어.”
아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이 다니는 태권도장과 비교했다. 한마디 덧붙였다. 한미가 태권도를 잘하더라고.
손주뻘인 아이들과 한 공간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엄마는 어땠을까.
엄마는 흰 띠를 매고 처음 운동을 시작한 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딸, 엄마 오늘 도장 다녀오는 길이야. 딸이 사준 도복 내일 도착한다네.”
엄마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엄마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처음 엄마가 버킷리스트를 실행하겠다는 말에 놀랐고, 아디다스 도복을 주문했다는 말에 장난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실감했다. 도복값은 선물로 내가 이체하겠다고 했다.
왜 태권도일까.
4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세상이 헛헛하다고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살았다 할 것 없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고. 30년을 넘게 지지고 볶고 산 세월이 구름처럼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고. 그리고 혼자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1번은 유럽여행도 아니요, 히말라야 등반도 아니요, 다른 멋진 남자와 살아보는 일도 아니었다.
일단 몸이 허락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더 나이 들기 전에 하루빨리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고 엄마는 생각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장에 갈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만 같은 공간에서 나이는 잊고 나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지가 아니었을까.
아이들과 함께 『흰 띠가 간다』라는 동화를 읽은 적이 있다.
표지 속 주인공 남자아이는 검은색 합기도 도복을 입고 흰 띠를 매고 있었다. 관장님에게 생애 첫 띠를 처음 받은 날, 아이는 자꾸만 흰 띠에 눈이 갔다. 볼수록 뿌듯해서다. 배가 살짝 조여도 똥배가 쏙 들어가고 제법 운동하는 사람 같은 포스가 나는 것 같다며. 그 부분을 읽으며 자꾸만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도 지금쯤 도장 갈 준비 중이겠지. 미리 저녁을 든든히 먹는다고 4시에 밥을 안친다고 했으니까. 6시 수련타임 10분 전에 도착하려면 5시 반에는 집에서 나가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