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인 Aug 25. 2023

버킷 리스트 No.1

그녀의 컬러벨트 (2)

한 소녀는 학교가 끝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곳이 있었다.

문구점이 아니라 시골의 한옥 구석이었다. 그곳은 한옥을 개조한 태권도장이었다. 도장을 다니기엔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8남매 중에 넷째, 딸 중엔 첫째. 소녀는 멀리서 쭈그려 앉아 보고 또 봤다. 사범님의 멋진 발차기를. 여러 명의 힘찬 기압 소리가 메아리처럼 귀에 울렸다.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을까. 그 소녀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압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고 싶었다.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었다. 간절했던 마음이 수십 년 동안 마음 한편에 웅크리고 있었으니까.


짱 태권도는 어느덧 중년이 된 소녀의 마음을 받아준 곳이다.


어떤 테스트도, 판단도 없이. 관장님은 그저 가능하다는 말 한마디로만 답했다.

40대 선수 출신 남자 관장님 한 분, 경력이 10년도 넘는 여자 사범님이 한 분 계신다고 했다. 한 타임에 아이들이 10명 남짓이었다.


손주들은 외할머니가 다니는 도장에 따라가 본 적이 있다.


“엄마, 한미(할머니)가 다니는 도장은 노는 시간이 별로 없어.”

“그래? 너희 태권도랑 달라?”

“응. 우리는 품새 10분 정도하고 피구랑 게임 많이 해. 근데 짱 태권도는 한 시간 내내 품새 하고 미트 발차기하더라. 수업 끝나고 형들이랑 축구하고 놀았어.”


아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이 다니는 태권도장과 비교했다. 한마디 덧붙였다. 한미가 태권도를 잘하더라고.


손주뻘인 아이들과 한 공간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엄마는 어땠을까.

엄마는 흰 띠를 매고 처음 운동을 시작한 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딸, 엄마 오늘 도장 다녀오는 길이야. 딸이 사준 도복 내일 도착한다네.”


엄마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엄마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처음 엄마가 버킷리스트를 실행하겠다는 말에 놀랐고, 아디다스 도복을 주문했다는 말에 장난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실감했다. 도복값은 선물로 내가 이체하겠다고 했다.




왜 태권도일까.

4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세상이 헛헛하다고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살았다 할 것 없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고. 30년을 넘게 지지고 볶고 산 세월이 구름처럼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고. 그리고 혼자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1번은 유럽여행도 아니요, 히말라야 등반도 아니요, 다른 멋진 남자와 살아보는 일도 아니었다.


일단 몸이 허락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더 나이 들기 전에 하루빨리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고 엄마는 생각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장에 갈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만 같은 공간에서 나이는 잊고 나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지가 아니었을까.


아이들과 함께 『흰 띠가 간다』라는 동화를 읽은 적이 있다.

표지 속 주인공 남자아이는 검은색 합기도 도복을 입고 흰 띠를 매고 있었다. 관장님에게 생애 첫 띠를 처음 받은 날, 아이는 자꾸만 흰 띠에 눈이 갔다. 볼수록 뿌듯해서다. 배가 살짝 조여도 똥배가 쏙 들어가고 제법 운동하는 사람 같은 포스가 나는 것 같다며. 그 부분을 읽으며 자꾸만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도 지금쯤 도장 갈 준비 중이겠지. 미리 저녁을 든든히 먹는다고 4시에 밥을 안친다고 했으니까. 6시 수련타임 10분 전에 도착하려면 5시 반에는 집에서 나가야겠네.’     


적막했던 엄마의 저녁 일상에 활력이 끼어들었다.

이전 05화 육십인데 가능할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