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점에 가보니 어휘력에 관한 책들이 꽤 많았습니다. 좋은 단어나 문장을 모아둔 책도 있고, 필사 노트 형식으로 된 것도 있었습니다. 저도 그중에 하나 사봤는데 괜찮았습니다. 조금씩 따라 쓰다 보니 문장의 리듬 같은 게 손끝으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단어를 많이 안다고 끝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고 있는 어휘의 양만큼 표현 습관이나 사고방식도 중요한 게 아닐까요? 요즘 제가 하는 대화를 돌이켜보면 참 단촐합니다. 누가 "어디 어땠어?"라고 물어도 대답이 그냥 저냥 비슷하죠. 나빠-별로야-그냥 그래-좋아-정말 좋아-역대급이야. 여기서 왔다 갔다하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대상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 수준을 평가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맛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이렇습니다. "그 식당 어땠어?"라는 질문에 대부분 "맛있었어" 혹은 "별로였어"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훨씬 더 많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맛이 좋고 나쁘고, 분위기가 좋고 나쁘고, 서비스가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여러가지를 그냥 묘사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향이 꾸릿꾸릿한 것 같으면서도 구수하더라", "눈이 가는 곳마다 아기자기한 소품이 있어서 기다리는 시간도 즐겁더라", "마당도 있고 자리도 띄엄띄엄 둬서 사람이 많아도 복잡하진 않더라.."하는 식도 가능했을텐데 잘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행지의 풍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 어땠어?"라는 질문에 "좋았어", "경치 죽여줬어"라고 답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본 것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늘의 색, 건물들의 배치, 거리의 비좁음, 바람의 느낌. 물론 사진이 모든 설명을 대체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직접 겪은 감각의 느낌이라는게 있으니까요.
이런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무언가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 마음에는 결국 '좋았다' 혹은 '아쉬웠다'는 감정의 결론이 가장 마지막에 남기 때문입니다. 책을 덮거나 영화관 문을 나설 때, 우리는 그 여운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옮기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종합해서 별점으로 마무리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만 기억하다 보면, 정작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스쳐 지나간 수많은 감각의 조각들은 놓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고방식의 전환일지도 모릅니다. 평가에서 관찰로 시선을 옮기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은 내려놓고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나? 낯설었나? 의외였나?"를 떠올려보는 것입니다. 경험을 하나의 수직선이 아닌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선 무엇을 말할지, 시선의 초점을 '결과'에서 '장면'으로 옮겨보는 것입니다. "맛있었어"라는 최종 결론뒤에 내 감각이 포착한 구체적인 지점들을 덧붙여 것이죠. "국물이 진했다"거나 "씹을수록 단맛이 났다"는 미각의 기록, 혹은 "건물 사이로 바다가 조각처럼 보였다"는 시각의 포착처럼요. 평가의 말에 가려져 있던 실제 경험들이 훨씬 더 생생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그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지, 의식적으로 단어의 선택지를 넓혀보는 단계입니다. '좋다'나 '나쁘다'처럼 익숙하고 편한 단어 뒤에 숨지 않고, 그 상황에 어울리는 더 정교한 단어를 찬찬히 골라보는 것이죠. 하늘을 보더라도 단순히 "파랗다"고 하기보다 "투명하다"거나 "빛이 바랜듯하다"는 식으로 내 뜻과 가장 닮은 단어를 찾아내려 애쓰는 과정입니다. 여기에 비유나 다른 표현의 방법까지 덧붙인다면 '어휘력이 좋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도요.
흔히들 어휘력이란 많은 단어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본다면 내 생각을 충분히 표현할 만큼 단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를 던져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할 단어는 충분하더라도, 정작 말로 드러내고픈 생각이나 감정의 폭이 좁은 상태를 과연 어휘력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어휘력은 단어의 개수만이 아니라 세상을 얼마나 다채롭게 바라보는가와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좋고 나쁨이라는 하나의 축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단어를 알아도 결국 그 축 위의 단어들만 사용하게 될 테니까요. 오늘, 조금은 생소한 단어로 마음을 표현하보는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