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니 Jan 01. 2021

채움의 계절

_002


 3년 전 즈음 늦봄부터 초 가을까지 절에서 머물렀다. 20대 대학교 교정을 거닐어야 할 나이에 들어간 절은 때로는 낯설기도 했지만 당시 나에게 안정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한 산중의 절과는 다른 조용한 동네에 있던 평범한 건물 안 사찰이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느낀 건 깔끔하고 검소한 인테리어와 형용되지 않을 편안한 분위기가 풍겼다. 나 외에도 근처 고등학교를 다니는 여학생과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남학생 둘이 있었다. 그리고 큰 스님과 작은 스님이 계셨는데 보호자 겸 학습 선생님의 역할을 해주셨다. 집이 아닌 곳에서 생활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아직 쌀쌀했던 날씨에 내가 오기를 기다리던 방의 냉기는 낯선 공간의 어색한 기분을 더해주었다. 


 어젯밤 새로운 든 자리가 있었음이 무색하게 아침부터 절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침 6시에 기상을 하고 반쯤 뜬 눈으로 법당으로 가 108배를 한다. 처음 해보는 108배는 짧게 산 인생 동안 잊고 있던 잘못에 대한 반성을 꺼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만큼 고통이었다. 알이 베인 다리가 풀릴 때까지 계단의 개수를 세리며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침 명상까지 끝이 나면 짧은 공부와 아침 식사를 한다. 학교를 다니는 동생은 학교를 가고 두 남동생들과 당번을 정한 대로 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중간 쉬는 시간과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꽤 부지런히 하루 동안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또래 친구들과 다르게 난 오래 공시 준비를 했기 때문에 고민 없이 책과 글에 파묻혀 살 수 있다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초반에는 공동생활에 피곤함을 느끼기도 하고 바뀐 환경에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래도 스님께서 빨리 적응한 편이라고 말씀해주셨기에 내가 절 안의 삶과 조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처음 내 방으로 들어갔을 땐 찬 공기가 메우고 있었는데 어느새 여름의 뜨거운 공기로 채워져 갔다.

 어린 동생들이 여름이 오기 전에 해준 이야기로는 

“누나 여름에 에어컨이 없어요.”
“대신에 1인 1 선풍기예요.”

 그 얘기를 들을 땐 동생들이 귀여워 웃어넘겼는데 가볍게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아침 공기와 낮공기는 무게 자체가 다르게 느껴졌다. 물론 선풍기는 하염없이 돌아갔지만 자기주장이 강한 여름의 기온은 대단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던 나였기에 집에서는 아이스크림은 잘 사 먹지 않았는데 스무 살이 넘은 나이에 작은 스님의 아이스크림 허락이 하루의 기쁨에 전부인 날도 있었다. 농부가 비를 기다리듯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보는 것도 잠시 더위를 잊게 해 주는 즐거움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한 여름의 장마철이 지나 펼쳐진 쌍무지개와 함께 거짓말처럼 밤바람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다 같이 평상에 앉아 노을을 보며 수박을 먹기에 적당한 날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 내가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님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가 오니, 가을이었다. 스스로 아침 6시에 기상하고 법당을 가서 먼저 앉아있었다. 동생들 문제집을 스님 몰래 봐주기도 하고 아침 상을 차릴 때 몸이 먼저 움직여 준비하고 큰 스님이 여름 내내 키우신 상추의 맛도 알게 되었다. 마지막 날이 다가올 때에는 나만 절에 남아있었다. 동생들은 검정고시가 마무리가 되고 방학을 맞아 본가로 내려갔기에 나는 조용하게 짐 정리를 해야 했다.


“벌써 가을이 왔네. 민지가 올 때 선선한 봄 날씨였는데 말이야”

 평소와 같은 식사 후 스님께서 꺼내신 말씀을 듣고 나는 변화를 깨달았다.

 계절이 달라져 있음을 말이다.     

“여름에 너무 더울 땐 힘든 공부를 하는 너에게 에어컨이 있는 식당으로 가서 공부를 하라고도 해볼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에어컨이 있으니 계절의 변화도 모르고 살았을 것 같아 여기에 있는 만큼은 계절을 배워보라. 너를 그냥 두었다.”

     

 그 말씀에 미소가 번졌다. 스님 말씀대로 피부에 닿는 공기와 바람에도 감사했던 생활이었다. 비 오는 날이 다가오면 하늘과 구름 모양이 달라졌음을 알았고 바람의 냄새와 노을색의 색 번짐에 신기해하기도 했다. 자연이 키워낸 풀들과 그 맛을 보며 뭔지 모를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차디찬 추위도 극심한 더위도 지나고 나면 모두 그리운 순간들이라는 것도 알았다.


 절에서 지내면서 항상 스님께서 인자하게 나의 본모습을 받아만 주신건 아니었다. 때로는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냉정히 깨달을 만큼 따끔한 충고도 있었다. 마음의 배움이 부족해 스님의 뜻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계절에 널 그대로 두었다”는 말씀에 나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고 계셨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지은 실수가 있진 않았을까 부끄럼도 일었다. 지금도 크고 작은 일을 마주할 때면 스님께 안부인사와 함께 일상의 이야기를 나눈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 나에겐 너무도 소중한 가치를 주신 분들이기에 언제나 그분들의 안식을 빈다.


 여전히 절에서의 배움과 습관이 나를 또 한 번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채찍질을 하기도 한다.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이듯 계절을 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의 시간도 달리 보이고, 감사하게 된다. 하루를 채워가는 건 우리만이 아니라 계절도 하루를 살아간다. 꾸준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도 변화하는 계절과 같이 아름다운 순간 속에 있을 거라 생각한다.


커버 이미지 출처 : 제주도 시골길 무네 네이버 그라폴리오


작가의 이전글 Back Mirro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