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연에 필요한 매너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가을이 왔다.
가을이 되면서 주말 스케줄을 보면서 결혼식 시즌임을 제대로 실감하게 된다.
친한 동생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요즘은 축의금 내려고 일하는 것 같아"
이 말에 요즘 완전 공감하고 있다.
친한 사람의 결혼식이 아니라면 대부분 결혼식 자체에는 관심이 없기 마련인데
요즘은 그나마도 가지 않고 계좌로 축의금만 보내게 되는 경우가 늘어나다 보니
가끔은 축의금이 공과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분명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갔는데, 내 손에 들어오는 건 없는 느낌.
하지만 결혼식에 참석했다면 없던 열정도 제대로 훅~ 올라오는 시점이 있다.
바로 식사시간. 사람들은 피로연 음식에 참 관심이 많다.
결혼식장 안에서는 세상 의욕 없던 사람도 피로연 자리에 가면 모드가 살짝 바뀐다.
그동안 숱한 축의금을 지불하며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음식에 관한 모든 데이터를 총출동시켜서 열정적으로 비교하고, 예리하게 평가한다.
단순히 배가 고프거나, 음식이 앞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축의금에 대한 가성비를 음식으로 평가하고 있는 걸까?
낮은 기대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보다 더 낮은 평점을 주게 된다.
결혼을 위한 비용 중에 집이나 혼수를 제외하면
아마 가장 큰 지출 중 하나가 피로연 식사비가 아닐까?
결혼식을 준비하는 많은 커플들이
피로연 장소와 음식에 굉장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비용을 들이고, 다방면으로 신경을 쓴다 하더라도
'피로연 음식은 욕먹지 않은 것만으로도 성공'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좋은 평을 받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피로연 식사는 한식, 양식, 뷔페 중 선택하게 되고
서비스 방법도 한상차림과 코스 등을 선택하게 된다.
예비부부들은 이 선택에 있어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아무래도 앉은자리로 음식이 제공되는 한식이나 양식으로 하면 좋은데
한식으로 하자니 불고기, 갈비탕처럼 평범한 듯한 메인 메뉴가 좀 아쉽고,
양식으로 하자니 어르신들 입맛에 맞을지 고민이 된다.
뷔페로 하면 다양한 음식들이 있어 좋긴 하지만
많은 분들이 동시에 식사를 하다 보니 동선이 매우 복잡해질 테고
멀리서 오신 가족이나 친지분들 중에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꽤 있을 텐데
그분들에게는 힘든 식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어느 부분을 포기해야 하나? 어느 쪽에서 욕먹는 게 나을까?
장단점이 가장 극명한 뷔페를 제외하고도
한식이나 양식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아직 더 남아있다.
한식의 경우 한상차림으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 메인 요리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을 미리 세팅해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따끈따끈함이 생명인 전은 모두 식어있고,
촉촉하고 아삭함이 포인트인 나물류들은 말라서 질겨진다.
양식의 경우 코스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단시간 안에 나와야 하는 음식의 종류가 많다 보니
테이블 간의 순서가 차례대로 지켜지지 않고,
메뉴와 다음 메뉴 사이의 시간이 들쭉날쭉한다.
분명 옆 테이블보다 우리가 먼저 식사를 시작했는데,
우린 아직도 메인 메뉴를 기다리고 있고,
저긴 메인 메뉴 끝나고 디저트를 먹고 있다.
한참 뒤에 메인 메뉴가 나왔는데 우리 테이블에서 나만 빠졌다.
멀뚱멀뚱 5분째 빈 접시만 보고 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아주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어쩌면 별일 아닐 수 있는데, 막상 이 상황에 맞닥뜨리면 굉장히 빈정상한다.
결혼식 피로연 식사가 좋은 평을 받을 수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내가 낸 축의금 때문이 아니고, 예비신랑, 신부의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바로 결혼식 피로연이 가진 특성 때문이다.
결혼식 피로연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수의 인원이 거의 동시에 식사를 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주방에서는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엄청난 긴장감이 감돈다.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운 긴장감.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둥~ 서비스가 시작되면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현장이 된다.
총보다 더 살벌한 칼부림이 난무하고,
엄청난 화염이 끝없이 피어오르는 말 그대로 진짜 전쟁터가 된다.
숙달된 전문가가 특별한 변수 없이 진행한다 하더라도 아주아주 어려운 일이다.
결혼식 피로연은 매일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결혼식 피로연처럼 대규모 식사를 진행하는 경우는
결혼식 시즌에, 그것도 주말에만 한시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다.
그러하기에 직무에 숙달된 정규직 인원을 상시 충분히 확보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서비스 현장에선 당연히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많은 부분을 담당하게 되고,
난이도가 상에 해당하는 대규모 피로연 식사에서 숙련도가 다른 직원들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서비스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똘끼 있는 자유분방한 알바가 한 명 끼어있으면
손님은 5분에 한 번씩 폭발하고, 매니저의 수명은 한 시간에 5년씩 단축한다.
결혼식 피로연은 소중한 사람이 모이는 특별한 시간이다.
결혼식 피로연처럼 다양한 연령층의 고객이 이용하는 식사 장소가 또 있을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취향과 개성이 정말 제각각이다.
남녀노소 모든 연령층의 기호와 개성을 맞추는 일이 불가능하니까
어떤 부분은 포기를 해야 하는데 사실 결혼식 피로연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곳에 모신 분들이 너무나 소중한 분들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어렵게 올라오신 이모할머니.
멀리 해외에서 날아온 나의 절친.
항상 어렵기만 한 직장 선배까지.. 어느 한 분 쉬이 포기할 수 없다.
정말 피로연 식사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에라 모르겠다. 내 취향대로 했다간 결혼 자체에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
숱한 축의금을 지불하고 얻게 된 나만의 피로연 맛집 리스트들 중에서
개인 취향을 좀 빼고, 피로연 식사를 위한 솔루션을 찾아보았다.
우선 가장 호불호 없었던 메뉴는 한일관의 한식이었다.
이곳의 음식이 특별히 맛있다거나 아주 훌륭한 서비스 때문은 아니다.
너무 과한 가격이 아니었고,
항상 평균 이상의 음식 맛을 유지하였으며,
숙달된 직원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피로연 식사이기 때문이다.
한일관 피로연 메뉴는 한상차림을 기본으로,
고객의 선택에 따라 메인 요리를 선택적으로 제공하는데
기본 음식은 아르바이트 직원이, 메인 메뉴는 숙달된 직원이 제공한다.
서비스의 난이도에 따라 역할이 나뉘어 있어서
고객의 입장에서는 비교적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메뉴 역시 그러하다.
유기나 돌솥 같은 고급 식기에 플레이팅 되어 제공되기 때문에
갈비탕이나 불고기, 골동반 같은 메뉴가 메인 요리여도 아쉽지 않았다.
피로연 식사에서 산해진미를 먹고 싶은 마음은 아니니까.
또 다른 곳은 스몰웨딩을 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는데
스테이크가 코스로 나오는 양식이었다.
사실 이 경우는 레스토랑보다는 신랑 신부의 센스가 돋보였던 피로연이었다.
스몰 웨딩이긴 했지만 전체 인원에게 동시에 식사를 제공하다 보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그런데 뷔페식으로 제공되는 다과 케이터링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보통 결혼식 단체사진의 가장 마지막은 친구들과 직장동료들 차례인데
사진을 찍고 나면 식사 차례에서 후순위로 밀려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친구들이 기다리는 동안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예쁜 야외 공간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스낵과 음료 섹션을 따로 마련한 것이다.
이 날 한껏 차려입은 친구들과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느라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식사를 마치신 어르신들은 친구들이 밖에서 사진 찍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서
'아고~ 젊은 사람들 식사하게 우리는 그만 일어나자'하시면서 자리를 비워주신다.
그리고 친구들이 빈자리를 찾아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 케이터링 존은 식사를 마친 어르신들이 풍성한 후식을 드시는 장소가 되었다.
배려가 넘치고 센스가 넘치는 피로연이었다.
정규직원 & 아르바이트 직원
평범한 메뉴 & 특별한 플레이팅
코스요리 & 뷔페식 케이터링
어르신들의 너그러움 & 친구들의 젊음
이 모두가 이러한 하이브리드적 요소 덕분에
험난한 결혼식 피로연 시장에서 높은 평점을 쟁취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이 하이브리드적 요소 안에는 사람다움과 전문성이 어우러져있다.
마음을 다해 준비하는 예비부부가 있으며,
어려운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직원들이 있다.
하이브리드 피로연의 완성을 이루어내기 위한 마지막 조각은
가족의 마음으로 가는 손님일 것 같다.
이것이 피로연에 가장 필요한 매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