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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 Oct 09. 2021

와인 냉장고를 로맨틱하게 사용하는 방법

와인 냉장고 사용에 관한 매너

아름답고 무용(無用) 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


쇼핑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

특히 오랫동안 내 마음속 원픽이었던 아이템을

엄청난 경쟁을 뚫고, 심지어 할인된 가격으로 겟 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푸드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을 가지기 전부터

나는 원체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애정 해왔다.

그리고 그것들의 또 다른 가치를 안다.


하지만 무용(無用)하게 두지 말아야 하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아이템이 있다.

바로 와인 냉장고 같은 것이다.




착각으로 시작하고, 무지해서 반복되는 일


많은 사람들은 와인 냉장고를 구매할 때,  

멋진 와인 라이프를 꿈꾸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 상상 속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여 살짝 취할 정도이다.


하지만 와인냉장고가 1, 2만 원 짜리도 아니고,

서랍에 쏙 들어가는 크기도 아니어서

구매하기까지 참 많은 내적 갈등이 일어나는 건 어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망설임을 이겨내고

와인 냉장고를 사야 하는 숱한 이유가 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이유들은 더 늘어난다.


그렇게 힘겨운 과정을 거쳐 드디어 내 공간에 와인 냉장고가 들어왔다.

아직은 비어있는 칸이 훨씬 더 많은 와인 냉장고를

단지 들여놓았을 뿐인데 왠지 성공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시간이 갈수록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에너지 효율이 너무 낮은가?'

'팬소리가 너무 큰 가?'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나?'

처음부터 모르던 사실은 아니었는데 '너무'한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떠오르지 않는다.

아예 그 존재 자체를 잊는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는 운동 기구나 베이킹 도구들처럼..



같은 와인, 다른 행복


처음 와인을 접했을 때, 나는 와인 자체에 대한 매력보다는

와인을 진심으로 즐기는 와인 라이프, 그 문화가 너무 좋았다.

내 눈에 똑같아 보이는 와인들을 보며

내 입에 쓰기만 한 와인의 맛을 보며

감탄과 감동을 연발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모습이 괴이할 정도로 충격이었다.

그런데 한 편 그 모습이 내심 부러웠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를 그들은 알고 있는 듯했고,

그들은 그 세계를 진정으로 즐기고 있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내가 알게 된 미국 사람들의 와인 라이프는 또 달랐다.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부담 없는 가격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편하게 즐기는

매우 실용적인 생활 밀착형 와인 라이프였다.

그런데 그들에겐 일상에서 즐기는 와인 라이프와 함께

특별한 와인 문화가 더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와인의 빈티지를 굉장히 로맨틱하게 이용하는 아주 근사한 와인 문화이다.



와인 냉장고와 맥주 냉장고의 차이


와인 용어 중에서 빈티지라는 단어는 '포도의 수확 연도'를 의미한다.

같은 와이너리의 동일 와인이라도

특별히 좋은 포도가 수확된 해의 와인을 '빈티지 와인'이라고 하는데

유명 빈티지 와인은 수량이 한정적이어서 비싸기도 하고 귀하기도 하다.

그런 빈티지 와인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비로소 손에 들어오는 와인도 있다.

이렇게 조상님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빈티지 와인을 어렵게 공수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맛보기까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정말 특별한 날을 위해 고이고이 아껴둔다.

진짜 웬만해서는 오픈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와인을 볼 때마다,

문득 생각날 때마다 므흣한 미소를 숨길수 없다.

만약 누군가 그런 와인을 당신을 위해 기꺼이 오픈했다면 그것은 찐 사랑이다.


그래서 그런 와인들은 오랫동안 맛을 유지하고 잘 숙성시키기 위해서

일정한 컨디션을 유지해주는 와인 냉장고(와인 셀러)가 꼭 필요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시로 열고 닫는 맥주 냉장고가 아니라

수년이 지나도 와인의 맛을 최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진정한 와인 셀러가 꼭 필요한 것이다.

와인 자체가 워낙 온도, 습도, 진동 등의 변화에 민감하기도 하지만

고급 와인일수록.. 오래 보관할수록.. 더 예민한 성향을 가지기 때문이다.

 



오랜 기다림이 주는 깊은 감동


미국인 친구, 샬롯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와이너리에서 결혼식을 했다.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빈티지 와인이었다.

샬롯의 부모님은 오래전 샬롯이 태어난 해의 빈티지 와인을 한 박스 구매하셨다.

그리고 와인 냉장고(와인셀러)에 고이고이 보관해두셨다.

이름하여 ‘샬롯 와인’

샬롯의 부모님은 샬롯 와인을 준비하고 보관하는 내내

언젠가 이 와인들을 오픈하게 될 순간을 떠올리며

가끔 미소도 짓고, 자주 행복하셨을 것 같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그날은 샬롯이 스무 살, 성인이 되는 생일이다.

생일파티에서 샬롯 와인 한 병을 오픈했다.

첫 번째 샬롯 와인을 오픈하기까지 자그마치 20여 년을 기다렸다.

꼬맹이 샬롯과 함께 많은 미소를 짓게 했던 그 와인은

샬롯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그리고 드디어 나머지 와인들을 오픈하는 날이다.

바로 샬롯이 결혼하는 날, 

이 날, 이 와인은 샬롯의 시간들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샬롯 와인이 기다려 온 시간만큼 아름다운 샬롯의 추억들을

새롭게 가족이 된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향기로운 순간이다.


샬롯은 정말 ‘특별한 기억’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와인의 향기 때문인지..

그날의 분위기 때문인지..

너무나 감동적이고 특별했던 그때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비록 나는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는 지금도 나의 심장박동수가 마구마구 올라간다.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와인냉장고


막 결혼한 한 커플이 그 해의 빈티지 와인을 한 박스 구매한다.

1주년, 2주년, 또 5주년, 10주년.. 둘 만의 특별한 기념일에

이 빈티지 와인은 두 사람에게 아주 로맨틱하고 의미 있는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처음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게 되는 와인.

오랜 시간 함께 한 커플 역시 시간이 쌓여갈수록  서로에 대한 깊이가 더해진다.

처음과는 다르지만 참 소중한 마음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구 상에서 딱 둘만이 알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빈티지 와인과 오랜 커플은 참 많이 닮아있다.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와인을 브리딩으로 깨우면

그 진정한 맛과 매력적인 향이 살아난다.

이처럼 두 사람 안에 내재되어 있던 특별한 로맨스를

빈티지 와인이 세상 달콤하게 깨워줄 것이다.




나 역시 종종 팬 소리와 에너지 효율에 대한 생각을 하며

와인 냉장고를 맥주냉장고와 다를 바 없이 사용할 때가 더 많다.

외식 분야의 전문가로서 와인 냉장고를 향한 최소한의 매너는 지켜보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해보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 나의 와인 냉장고를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아이템으로

또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아이템으로 매너 있게 사용할 날이 오겠지?

그런 로망이 있기에 부끄럽기 그지없는 와인 냉장고 매너를 가진 지금도  

가끔 미소 짓고, 자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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