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어쩌면 이미 정해진 대로

단편소설 [ 쩨쩨한 히어로 ]

by 정오월


실마리


TV를 끄고 생각에 잠긴다. 뉴스에서 본 피해자 가족의 인터뷰가 다시 떠오른다. 주변에서 따뜻하게 그를 감싸줬으면 좋겠다. 비통한 심정을 달래주고 살아갈 힘을 내는데 보탬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범죄사실에만 관심 갖지 말고 괜히 일을 키워서 회사를 시끄럽게 한다고 피해자를 비난했던 동료들과 그 이상은 해줄 게 없다고 물러나 있던 경찰과 법이 원래 그렇다고 피의자 처벌에 소극적인 사법부와 떠들썩한 사건이 있을 때에만 목소리를 내고 막상 아무것도 안 하는 국회도 매서운 눈초리로 봤으면 좋겠다.


그날 나는 어떤 소원을 빌었어야 했을까. 나쁜 짓을 하고도 제대로 벌 받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벌주려면 뭐라고 빌었어야 했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할머니를 처음 만났던 그날로 다시 돌아가서 내가 제대로 된 소원을 빌고 진짜 초능력을 얻어서 나쁜 놈들을 모조리 벌주고 더는 나쁜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꽤 쓸모 있는 소원이겠다.


어차피 내 인생에는 덤이 없고 행운 같은 건 내 몫이 아니기 때문에 일생일대의 소원성취 기회를 나한테 딱히 좋을 것도 없는 사소한 바람으로 써버린 게 아쉽지 않았었다. 작으나마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는데, 작아도 너무 작으니 도움은커녕 티도 안 나네. 혹시라도 다시 한번, 어쩌다가 숲 속에서 길 잃은 사슴을 구해주거나 램프에 갇힌 요정을 꺼내 주거나 해서 소원을 빌 기회가 생길 때를 대비해 미리 잘 생각하고 정리해 둬야겠다. 진정으로 정의사회를 구현하는데 혁혁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소원을. 그리고 항상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있는지 살펴봐야지. 되지 않을 일인 걸 알지만 찬찬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진다. 뉴스를 보고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리던 마음이 어느새 진정되고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일신의 영달보다는 전 인류를 먼저 생각한 거시적인 나의 안목과 세계관이 조금 멋지다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전에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로부터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잘 지내시나요? 팀장님이 회사를 떠나신 지 벌써 4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제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우리 팀 한 번 뭉쳐야지요.’


정 대리. 반갑네. 먼저 연락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회사에서 붙잡기 어려운 상황이긴 했지만, 내가 갑자기 다 내팽기치고 뛰쳐나온 거나 마찬가지여서 나 대신 고생 많이 했을 텐데. 만나서 뭐라고 할지, 그동안 한 거 없이 놀았다는 얘기를 어떻게 포장할지는 그때 가서 고민하기로 하고 일단 만나자고 한다. 아주 오랜만이다. 직장 동료와 회사 외의 공간에서 사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거. 뭐 회사와 회사 사람들 욕이 대부분이겠지. 정 대리 말처럼 예전 직장 동료니까 편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흔쾌히 답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연락드릴까 말까 고민 좀 했었거든요. 조만간 야근 안 하는 저녁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며칠 후


“다 김 부장님 때문이잖아요.”


정 대리가 한 때 같은 팀이었던 나와 본인, 사원, 세 사람의 잔에 소주를 따르고, 셋이 잔을 부딪치고, 셋이 동시에 잔속의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나서 제일 먼저 말을 꺼낸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사정을 이 자리에서 한 번에 다 풀어낼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듣기만 한다.


“어쩜 그렇게 말도 안 되게 팀장님을 쫓아내고는 김 부장님 본인도 바로 쫓겨나다니요. 벌 받은 거예요.”

그만둔 게 아니고 쫓겨난 건가. 내가 바랐던 게 이거였나. 똑같이 당해 보라는 것. 아버지처럼 이 아니라 나처럼이었군. 이렇게 간단하게 실현되다니. 미안하지도 않고 유감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통쾌하지도 않다. 아무 감정이 안 생긴다. 정 대리가 세 사람의 술잔을 하나씩 다시 채우면서 계속 얘기한다.


“벌 받은 게 아니면 직원들 다 있는 데서 사장님한테 큰 소리로 혼나고 바로 짐 싸고 그랬겠어요? 김 부장님이 그런 일 당했다고 해서 나갈 분도 아니고, 분명히 뭔가 더 있었을 거예요. 대표님이 그렇게 화를 내신 걸 보면 일을 그냥 잘못한 정도가 아니라 크게 사고를 친 걸 거예요. 팀장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김 부장님이 가끔씩 중요한 일 잘못 처리하는 거. 팀장님이 티 안 나게 수습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죠. 말은 안 했지만 저도 알고 있었어요.”


아직 천둥벌거숭인 줄 알았는데, 정 대리가 어느새 회사 안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상황을 알아보기도 하고 아는 걸 숨길 줄도 아는 눈치가 생겼네. 왠지 좀 기특해. 내가 해준 건 없지만 말이야.


“어머, 팀장님 웃으시네요. 웃는 얼굴 보기 좋아요. 같이 일할 때는 그렇게 웃는 걸 못 본 것 같은데. 그렇다고 험악한 얼굴은 아니었어요. 그냥 늘 지쳐 보였다고 해야 하나. 그럴만했죠, 뭐.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시는 데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아무튼 팀장님 나가시고 나서 처음엔 저도 그만둘까 했었어요. 든든한 사수가 없는 게 얼마나 서럽던지. 근데 또 익숙해지네요. 팀장님도 지금 훨씬 좋아 보이세요. 회사 밖에서 만나서 그렇겠죠?”


거의 정 대리 혼자서 술잔을 채우고 얘기를 하는데 분위기가 제법 화기애애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없는 것 같다. 좋다는 얘기다. 예상대로 회사와 회사 사람들 욕이 대부분이지만 분위기가 처지지 않는 건 정 대리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태 몰랐네. 이렇게 밝은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곧 훌륭한 팀장이 되겠다.


“우리, 종종 이렇게 만나요.”


나만 이 만남이 좋은 건 아닌가 보다. 정 대리가 빈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 막내 사원은 그 말에 진심으로 동의하는지 직장상사 앞이라 괜찮은 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팔을 크게 휘두르며 큰 목소리로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각자 집으로 향해 돌아섰다. 슬슬 결말이 지어지는 것 같다.



환절기


9월. 여름이 조금 남아 있는 가을이다. 한낮에 집에 있으면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덥지 않지만 바깥에서 직접 받는 햇볕은 뜨겁다. 여름이 뚝 끊어지고 갑자기 가을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서, 조금씩 변하는 날씨에 적응하면서 계절이 바뀌는 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섬세하게 계절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더 이상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않게 된 것도 전부 다행이다.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산책을 나간다. 노는 게 아니라고, 영감을 얻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걷는 거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지 않고.

대문을 나서니 좁은 골목 안에 이삿짐 트럭이 서 있다. 전통찻집이 이사를 가는 모양이다. 짐을 실어 나르는 거리를 최소화하려고 가게 문 앞에 트럭을 세웠군.


‘왜, 이삿짐 트럭도 우리 집 앞에 세우지?’


찻집 사장이 이제껏 처음 보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고도 속으로 비아냥이 일어난다. 굳이 다가가서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늘 그랬던 것처럼 골목길의 반대편으로 돌아서서 걷는다. 그 가게가 없어지길 바랐던 내 소원이 이루어진 걸까. 임대차계약이라는 게 있으니 갑자기 생긴 일은 아닐 거 같고, 그렇다면 마침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시기라서 내가 바라기 전에 이사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걸까? 어차피 초능력을 쓰는 거라면 임대차계약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나는 속이 시원하다. 내 소원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마음이 편하다. 정말 편하다.


천천히 걸어서 돌담길에 다다른다. 한여름에 왔을 때에 비해 햇살의 색이 포근해지고 그림자가 깊어진 게 눈에 보인다. 갈색으로 군데군데 물든 담쟁이 잎들이 바람에 일렁거린다. 내일 같은 시간에 오더라도 지금과 똑같은 풍경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다시는 볼 수 없으니. 사진 파일을 열어서 보니 방금 사진을 찍으면서 보았던 풍경 같지가 않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실제 골목길 풍경이 훨씬 넓고 따사롭고 선명하다. 천천히 걸으며 사진 대신 눈에 담는다.

벽화는 그대로 있다. 아무리 뚫어지게 바라봐도 그대로다. 삿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지팡이를 들고 있는 도사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는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서인가, 더 이상 할머니가 나에게 볼 일이 없어서 나를 찾지 않는 건가. 조금 아쉽다. 나도 이제 할머니에게 궁금한 건 없지만 벽화 속의 세상에 다시 가보고 싶기는 한데. 초가을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서 눈이 부신 벽화를 한참 바라보았더니 눈이 아리다. 이제 그만, 돌담길의 나머지 반을 마저 걸어가야겠다.


‘이미 알고 계실 거 같지만, 저에게 더 이상 특별한 능력은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순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포털 사이트에 로그인을 해 놓고 멍하니 화면을 보고만 있다. 메일을 써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여기까지 와 놓고는 다시 망설이는 거다. 커서를 ‘메일 쓰기’ 메뉴 위에 올려놓는다. 커서의 뾰족한 화살표 끝을 보면서 클릭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생각한다. 한참을 그렇게 꼼짝 않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전화가 온다. 메시지 알람이 아니라 전화벨이 울리는 건 무척 오랜만이다. 엄마네. 엄마는 내가 아직 회사에 다니고 있는 줄 아는데. 일에 방해될까 봐 근무시간 중에는 전화를 안 하는데 무슨 일일까 싶어서 바로 전화를 받는다.

“바쁘니? 응, 그냥.”


다행이다. 엄마가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리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말투로 바쁘지 않다고 말한다.


“큰집에 갔다가 집에 가는 길이야. 큰엄마가 또 먹을 걸 잔뜩 챙겨주셨잖니. 무거워서 손이 다 아프고 엄청 낑낑대면서 들었어. 괜찮아, 집까지 들고 갈 만은 해. 버스 타려고 정류장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네 생각이 나더라고. 버스가 오려면 시간이 한참 남기도 했고 생각난 김에 전화해 볼까 싶었지. 내가 안 하던 짓을 다 했네.”

엄마는 지금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게 분명한데, 다 알고 있는 것만 같다. 내가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에 떡볶이를 사 먹은 것도, 학원을 빼먹고 친구들이랑 놀다 온 것도, 시험을 봤는데 안 봤다고 한 것도 엄마가 귀신같이 알고 있어서 신기했는데.


이제 정말 때가 되었나 보다. 마음이 오락가락했는데, 움직이는 폭이 점점 좁아지더니 마침내 한 지점으로 수렴된 것 같다. 더는 망설여지지 않는다. 보낸 메일함을 클릭하고 6개월 이전쯤에 보냈던 메일 하나를 찾아낸다. 수신인의 이메일 주소를 클릭해서 받는 사람으로 설정하고 새로운 메일을 작성한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올해 초에 전무님께 ○○프로젝트 자문을 요청드렸던 실무 담당자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드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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