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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월 Nov 17. 2022

이렇게 다시 만나서

[ 수필 ]

< 대전 대동천변, 소제동 / 2022.11. >


우리는 ‘노잼 도시’라는 별명이 있는 대전에서 만났습니다. 친구가 사는 동탄과 내가 사는 대구 사이의 도시 중에서 기차역 가까이에 밥 먹고 커피 마시러 갈 만한 상업중심지가 있는 곳을 선택한 거죠. 서울, 부산, 대구 같은 대도시에 익숙한 사람들은 기차역 주변지역이라면 당연히 번화하지 않으냐 하겠지만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역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시피 하거나,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만 모텔 반 술집 반이거나, 시가지가 발달해 있더라도 친구와 놀러 갈 만한 동네는 아니기도 합니다. 대전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빵집 한 군데 말고는 갈 데가 없다고들 하는데, 바로 그 빵집이 있는 원도심 지역이 역에서 가깝고 그 사이에 대전천도 흐르고 있습니다. 예쁜 구석은 없어도 ‘노잼’은 아닌, 친구와 함께 가볼만한 도시로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실 친구를 만나는 데 어디인들 상관이 있을까요.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외출했다가 저녁을 차려주러 집에 돌아가야 하는 친구의 상황을 생각했습니다. 한시가 아까우니 동선을 최소화하고, 친구의 일생생활에서 벗어나기 힘든 아파트단지와 학부형이 없는 곳으로 가자는 거였죠. 거기에 이왕이면 특색이 있는 동네, 개성 있는 가게들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결국 ‘어디든’이 아니라 ‘핫 플레이스’를 찾은 거였군요. 어쨌든 우리는 소제동에 가기로 했습니다. 소제동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철도관사 수십 동이 모여 있는 관사촌이 남아있고 대동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오래된 만큼 낡고 비어 있는 건물이 많아서 근대의 정취와 을씨년스러움이 모두 느껴지는 관사촌에 몇 년 전부터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카페와 식당이 하나둘 생겨나더니 이제는 제법 핫 플레이스가 된 모양입니다. 친구는 가본 적이 없어서 궁금해했고 나는 3년 전에 갔을 때를 떠올리며 그 사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비교해보고 싶었습니다.


친구가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낸 후 서둘러서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한 시각이 열 시 남짓. 나는 그보다 십 분쯤 전에 대전역에 도착했습니다. 친구가 타고 오는 기차가 도착할 승강장 근처로 갔는데도 시간이 좀 남아서,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흐르는 물살에 실리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대합실’로 갔습니다. 대합실 입구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서서 대합실 공간과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죠. 가까이에서 나보다 네댓 살쯤 위로 보이는 여자분 둘이 손을 맞잡고 서서 들뜬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뭐 타고 왔어?, 얼마 만에 온 거야?, 이게 얼마만이니……. 나도 곧 친구를 만나서 저런 얘기를 할 거라고 생각하니 지켜보는 동안 코끝이 찡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서로 못 알아보고 지나쳐서 전화로 위치를 확인하면서 만나느라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지 못했네요. 나는 친구가 단발머리를 하고 빨간 후드 점퍼를 입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거라고 핑계를 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친구는 아주 차분한 성격입니다. 호들갑이라는 건 그 친구 사전에 없는 말이죠. 우리는 손을 맞잡거나 손뼉을 치거나 목소리가 커지거나 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소제동으로 향했습니다. 시가지를 남북방향으로 갈라놓고 있는 대전역의 서측에는 원도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쪽이 역의 전면이 되죠. 역사에서 계단을 한참 내려오면 넓은 광장이 있고 차량의 회차공간과 택시 승강장이 있는, 전국 어디에나 있는 기차역의 형태입니다. 소제동은 그 반대편, 대전역의 동측이자 후면에 있습니다.


역에서 소제동 방향 표지판이나 주변 지역 안내도 같은 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역을 빠져나왔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네요. 대합실 바로 앞의 출구로 밖을 내다보니 역전광장이 있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 주차장을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 역의 전면에는 광장, 후면에는 주차장을 배치하는 건 요샛말로 ‘국 룰’이죠. 역사를 빠져나와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는 주차장을 가로지르면서, 주차장을 벗어났는데도 동네라고 할 만한 게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가면서 친구는 약간 의구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가 3년 전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고 이 길마저 공사 중이이었다고 하니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친구의 둘째 아들이 아침 일찍 외출 준비를 하는 엄마에게 토스트를 해준 얘기로, 우리는 황량하고 어수선한 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이 훈훈했습니다. 잘 들어보니 엄마가 다 차려 놓았고 아들은 빵을 토스터기에 넣었다 꺼낸 게 다 인 것 같은데도 친구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슴을 부여잡았고, 나는 그 모습이 무척 좋아 보였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갈까 큰길을 따라갈까 하는데 몇 걸음 앞에서 어린 사람이 골목으로 걸어갑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라갔죠. 맞았습니다. 직선으로 쭉 뻗은 골목길 양측에 창고처럼 커다랗고 큰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그중 몇 군데에는 가게가 들어서 있지만 이른 시각인 탓에 다들 문을 안 열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골목에서 슬쩍 들여다보기만 했습니다. 3년 전에 갔었던 뽀얗고 예쁜 카페는 조금 꾀죄죄해진 것 같고 공사 중이던 곳은 술집이 되었군요. 새로 생긴 식당은 입구만 봐도 이국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어서 내부가 궁금했습니다. 급할 것도 없고 가게들이 영업을 시작하려면 한 시간 정도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우리는 골목마다 거닐었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걸으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내키는 대로 골목을 걸으며 볕이 잘 드는 식당과 카페 몇 군데를 점찍어 뒀습니다.


< 대전 대동천변, 소제동 / 2022.11. >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다리 건너 대동천 건너편의 산책로를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쬐었죠. 대동천 양쪽에는 오픈스페이스가 길게 이어져 있는데 산책로를 걷고 운동기구를 이용하고 벤치에 앉아 있는 동네 주민들이 꽤 보였습니다. 하천변의 도로에는 가끔씩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특별히 멋있지는 않지만 넓고 낮고 조용하고 볕이 드는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만큼 평온하게 얘기를 나눴던 것 같습니다. 등 뒤에서 산책길에 만난 강아지 두 마리가 큰 소리로 싸우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기 전까지 말이죠. 슬슬 일어날 때가 되었네요. 우리는 아까 보았던 식당 중에서 어디에 갈지 정하고 일어났습니다. 천천히 걸어서 아까와는 다른 다리를 건너고 아까는 지나지 않은 골목을 걸어서 식당에 가는 길에 점심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시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식당에 가 보니 맥주가 있었습니다. 볕이 통째로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커튼을 치지 않고 눈이 부신 걸 참으면서 식당을 잘 골랐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천히 점심을 먹고 근처에 봐 뒀던 카페로 갔죠. 대동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당이 있는 그 카페는, 그 새 달라진 태양의 고도 때문에 오전에 본 풍경과는 조금 다르면서 멋있어 보였습니다. 맛보고 싶은 디저트가 있었고 점심을 먹은 직후라서 배를 좀 꺼뜨린 후에 다시 오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다리를 건너서 걸어가 아까 봐 뒀던 카페 중에 하나인 베트남 커피를 파는 곳으로 갔습니다. 아주 오래전, 지금 계산해보니 놀랍게도 18년 전이네요, 우리는 같이 베트남의 호찌민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둘 다 커피를 좋아했고, 진득하면서 독하지 않은 베트남 커피가 맛있다며 매일 몇 잔씩 마셨었죠. 그때 얘기를 하면서 연유 커피를 주문하고, 베트남 분위기로 꾸민 카페 안을 둘러보다가 준비된 커피를 받아서 2층의 옥상으로 갔습니다. 또다시 눈부신 걸 참으면서 대동천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카페 앞길을 지나던 사람 둘이 우리를 올려다보고 ‘저기 괜찮다’고 하더니 잠시 후 커피를 들고 와서 우리 뒤쪽에 앉았습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배도 좀 꺼지고 나서 처음에 갔던 그 카페로 다시 갔습니다. 카페 안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잠시 둘러보니 뒷마당도 잘 꾸며 놓았고 대동천 방향으로는 넓은 창이 있어서 바깥 풍경이 훤히 보였습니다. 밖으로 나와 골목길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에서 노랗게 물든 이파리들이 비처럼 날리는 걸 보다가 짧게 동영상으로 찍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새 볕은 더 진해지고 그림자가 더 깊어진 앞마당의 풍경이 역시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침 대동천이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가 남아 있어서 친구와 나란히 앉았습니다. 두 번째 커피를 연달아 마시면서 두 잔의 커피 모두 연해서 괜찮다고 했죠. 관광지가 아니라면 굳이 먹어볼 생각이 들지 않는 쪼그맣고 예쁜 디저트를 하나씩 사서 그걸 또 반쪽으로 잘라 나눠 먹기도 했습니다. 보이는 건 가을이 맞지만 느껴지는 건 봄 같은 날씨 덕분에 우리는 그렇게 오후 내내 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사진은 안 찍어.”라고 했던 친구가 카페에서 자리를 옮겨 가며 사진을 찍더니 같이 셀카를 찍자며 팔을 이렇게 뻗었다가 저렇게 뻗었다가,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놓고 타이머를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내 뒷모습도 마음에 쏙 들게 찍어줬네요.


좋았습니다.


생각했던 그 맛이 아니지만 좋다. 보기보다 의자가 불편한데 그래도 좋다. 눈이 부셔도 좋다. 시야가 뿌연 게 미세먼지가 많은 거 같은데 따뜻해서 참 좋다. 하천을 조금만 정비해도 경관이 훨씬 좋아질 것 같아서 아쉽지만 지금도 좋다. 정말 좋다.


친구도 나도 좋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평일 낮에 대전의 핫 플레이스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니! 생각도 못 해봤잖아. 어쩜 이렇게 날씨마저 포근한지 말이야. 우리가 만난 게 5년 만인지 6년 만인 지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로 네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은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그마저도 네가 이동하는 경로 중에 들른 거였지. 네가 아이 둘을 키우면서 박사논문을 쓰고 일도 하느라 얼마나 폭풍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을 줄 짐작하고도 남아서 연락도 못 하겠더라. 언제나 뭔가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중일 것 같았어. 가끔씩 네가 서울에서 동탄으로 퇴근하는 길에 고속도로 정체가 너무 심해서 차가 서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차 안에서 전화를 하면 그게 다였네. 그래서 거의 일 년 만에 전화를 하면서도 네가 정말 받을까 싶었고, 통화를 하면서 한 번 만나자고 했을 때에도 정말 만나게 될까 궁금했거든.


이렇게 만나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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