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나를 괴롭히는데 나조차 나를 괴롭히네...
언젠가부터 퇴근하는 순간에도 한숨이 나왔다. 오늘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와 내일이면 생겨날 온갖 업무들을 생각하면 퇴근길에도 가슴이 답답하고 두려웠다. 오늘 하루 고생했다는 스스로의 다독임, 업무에 대한 성취감, 퇴근 후 휴식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었다.
터덜터덜 집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으면 자연스럽게 시간계산부터 한다. '지금 당장 샤워를 하고, 저녁을 차려먹고, 설거지까지 끝내면 대충 OO시겠군... 오늘은 꼭 기절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지.' 어느 순간부터 샤워와 식사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해내야하는 막중한 과업처럼 느껴졌다. 이 최종 과업까지 끝내고나면 드디어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고유한 내 시간'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루 중 유일하게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간이 오면 언제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졸기 일수였다. 직장에서 누적된 피로, 반복되는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인해서 마치 전원 스위치가 꺼지듯 했다. 일단 잠들지 않고 견뎌보자는 일념으로 컴퓨터 게임이라도 해보려 했다. 그러나 그 짧은 게임 로딩시간 중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처량함과 무기력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형광등도 끄지 못하고 반건조 오징어 마냥 널브러진 채 아침을 맞이했다. 눈을 뜨면 직장, 퇴근하면 무기력하게 잠, 다시 직장....나는 그렇게 일상이 직장으로만 가득차는 끔찍한 저주에서 수개월 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주말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금요일이 되면 먹을 거를 한가득 사놓고 유튜브를 보다가 잠들었다. 토요일이면 늦잠을 자다가 대충 끼니를 때우고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소중한 주말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매번 일요일은 다르게 보내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나마 일요일에는 자주 외출을 했다. 일부러 외출을 유도하기 위해 먹을 거를 토요일 식사까지만 사두었기 때문이다.(주변에 배달되는 식당은 치킨집 하나 뿐이었다) 그렇게 집을 나섰다가 잠시 동네 도서관에 들려 독서를 하거나 일기를 쓰다 보면 제법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곧 다가올 월요일에 대한 압박감, 내가 하는 독서와 일기가 당장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허무함이 드는 순간부터 그 외출이 너무나 피곤하게 느껴졌다. 이내 '내일부터 또 힘들 텐데 조금이라도 더 방에서 쉬어야지..'라는 생각이 들어 먹을 거를 사서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울적하게 일요일 저녁이 지나갔다.
일단 나의 무기력증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그저 '내가 남들보다 체력이 많이 약하구나, 나는 게으른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러다 더이상 이러한 일상을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나는 해결책을 찾기위해 무작정 무기력과 관련된 유튜브와 도서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무기력증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원인분석을 위해 나의 하루를 돌이켜보던 중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거의 항상 불안한 상태였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직장에 있을 때, 퇴근 후 방에 있을 때 조차도 내 몸과 마음이 경직되어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심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실제로 몸에도 힘이 자주 들어가 있다는 사실도 그제서야 알게되었다. 그러다보니 하루중 대부분의 시간이 즐겁지 않았고 피로가 금방 쌓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물론 무언가를 할 의지가 생기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그토록 불안하게 했을까?
첫 번째로 직장 그 자체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일과 중에는 수십 통의 전화와 수백 통의 카톡이 매일 오갔고, 이는 차분히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그리고 퇴근 후, 쉬는 날에도 업무연락이 자주 왔고 나는 꿈에서도 업무를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 번째로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직장에서의 업무는 나를 성장시키는 업무가 전혀 아니었다. 그저 하나의 부품으로써 열심히 마모되는 기분이었다.(월급이라도 많으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앞으로 발전 없이 내가 원하는 곳,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닌 조직에서 필요한 곳, 조직이 원하는 부품으로 사용되며 평생을 살아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숨 쉬기가 힘들었다.
불안과 걱정을 없애는 최고의 방법은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쉽게 생각하면 직장을 그만두거나 이직을 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해결책이다. 그러나 나는 정해진 의무복무가 있었기에 해당되지 않는 선택지였다. 따라서 나는 주어진 이 상황을 정면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에 했겠지'라고 나 스스로도 생각해 왔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바뀌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할 문제였다.
나는 여러 도서, 유튜브 영상들을 통해 배운 방법들을 조금씩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가짐의 변화를 통해 첫 번째 불안을, 생활패턴의 변화를 통해 두 번째 불안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먼저 나의 첫 번째 불안은 완벽주의 성향과 주변의 평가에 대한 의식 때문에 발생했다. 다양한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다보니 업무의 깊이가 매우 얕야졌다. 그리고 새로운 업무를 익혀도 내일이면 처음 접해보는 업무들이 쏟아졌다. 당연히 미숙한 결과물이 반복되었고, 잘 해내야 한다는 완벽주의가 있는 나로써는 큰 스트레스였다. 이러한 실수들로 누군가에게 내가 밉보이는 것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전부 다 스트레스였다. 그러다 보니 항상 모든 행동에 신경 쓰게 되었고, 실수에 대한 스트레스와 내가 누군가에게 욕을 먹었을 거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를 해결하고 싶었으나 그렇다고해서 내가 직장의 업무를 바꿀 수는 없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힘빼기' 전략을 택하기로 했다.
평소에는 매일 아침 '나는 잘할 수있어, 잘 해내보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출근했다. 그러나 당장 다음날이면 어느새 '아 가기 싫다, 하기 싫다'로 바뀌어 있곤 했다. 그래서 자기 최면의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보았다. '적당히 힘 빼고 하자, 못해도 상관없어,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자.' 그리고 새로운 업무와 실수에 대해 사고의 전환을 해보기로 했다. 새 업무를 배울수록 '모르는 업무의 숫자가 줄어드는구나!', 실수가 생길 때마다 '이 실수로 또 하나를 배웠네. 하루에 두 가지씩만 실수해도 100일이면 200가지를 배우고 성장하겠는걸?' 이런 식의 다소 유치한 사고를 습관화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동화 속 이야기처럼 하루아침에 내 마음가짐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악물로 매일 되뇌이다보니 조금씩 변화가 느껴졌다. 이전처럼 업무에 실수가 생겨도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또 하나 배웠네?', 오히려 잘 해낸 일이 생기면 '오? 힘 빼고 했는데도 잘되네?'라는 생각이 들어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한 뿌듯함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들의 시선, '그래 모두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을 수는 없지. 나도 사람인 걸. 욕하라면 욕하라지'라는 생각이 진심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자 소위말하는 '미움받을 용기'가 머리가 아닌 가슴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기 최면이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다면,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한다면, 분명히 시도할만한 시도이다.
"직장에서 적당히 힘을 빼자. 당장 내 업무나 주변 사람들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바꿈으로써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두 번째 불안의 해결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행동변화가 필요했다. 이는 첫 번째 해결책처럼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실천적인 해결법을 통해서 극복했다. 따라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법 분량이 많이 나온다. 이 내용은 별도의 글로 작성할 계획인데, 미리 짧게 요약하여 소개하자면 '하루를 세분화하자'와 '나 자신을 강아지 다루듯이 훈련시키자'이다. 사람도 결국 동물이다. 동물은 보상을 통한 학습을 한다. 나 자신을 정신력과 의지로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고등생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보상에 의해서 움직이는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길들이다 보면(?)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자기 비하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내 삶을 바꿀 수만 있다면 뭐든 못하겠는가)
그래서 이러한 변화를 통해 지금의 나는 무엇이 바뀌었을까. 업무 실적이 향상되었을까? 대인관계가 더 좋아졌을까? 새로운 눈부신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는 '갓생러'가 되었을까? 부끄럽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진 점들이 많다. 먼저 직장과 일상을 분리해서 눈앞의 순간에 집중하고 즐기는 법을 배웠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에서 뭐라도 해보는 삶으로 바뀌었다. 그 성과가 아무리 우스울지라도 나의 삶이 전보다는 더 풍요로워졌음에는 확신할 수 있다.
우리의 무의식 중에는 '잘'해야 한다,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집착이 있다. 이러한 성취욕은 충분히 건강하게 작용할 수 있으나, 여차하면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일', '좋은 성과가 없을 거 같은 일'은 아예 시도도 하지 않게 된다. 부정적 결과를 아예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삶에 대한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물론 아직도 부족한 편이다) 빠르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못하는 일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고 내가 잘하는 거, 성과가 좋은 것을 빠르게 찾아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이렇다 할 재능이 없었던지라 시도해보는 모든 일들의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의 의지력, 정신력, 동기부여가 부족하다는 잘못된 핑계로 더 이상 아무것도 시도해 보지도, 꾸준히 노력해보지도 않는 무기력증에 빠졌던 것이다.
"Some is better than None."
뭐라도 해보는 삶. 이것에 내 삶에 매우 큰 변화를 준 것 같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 사람일지라도, 그 순간의 상황이 그러할 뿐이지 분명히 이를 극복해 낼 수 있는 잠재된 힘이 있다. 다만 그 힘은 깨어나야 그 의미가 있고, 이는 타인에 의해서 자극되기도 하지만 결국엔 나 스스로가 깨워내야한다.
나는 언젠가 또다시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이러한 시련과 극복의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나중에 더욱 큰 시련이 찾아와도 결국엔 이겨내는 어른이 되어가는 거겠지.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