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돌 아래 숨은 알고리즘
《바둑돌 아래 숨은 알고리즘》
냉장고를 사러 갔을 뿐이었다.
그날 원주 롯데마트, 하이마트 매장 안에서 나는 우연히 한 체험대 앞에 멈췄다.
하얀 곡선의 몸체, 동그란 머리, 유광의 화면 안에 디지털 눈이 반짝였다.
“센스로봇입니다. 바둑돌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흑과 백, 단순한 색이 만든 복잡한 전장.
기계팔이 사각 보드 위로 천천히 다가가더니,
‘딱.’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기분 좋은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내 손끝에 땀이 맺혔다.
AI와 마주 앉은 바둑 한 판,
나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기계를 상대했다.
그가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안의 묘한 긴장과 흥분이 섞여 갔다.
그리고 결국—
내가 이겼다.
정말로.
그가 진심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로봇이 “수고하셨습니다”라며 바둑돌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건 기계가 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겼다고 믿는 감정을 '설계해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두렵도록 세련되었다.
그의 패배는 상품이었을까?
나의 승리는 체험 마케팅일까?
뒤늦게 보았다.
옆의 안내문:
“센스로봇 고급형, AI 바둑 오목 겸용, 1,310,000원.”
“난이도 설정, 5단까지 지원, 분석 알고리즘 내장, 어린이 교육 가능.”
“지금 무료 체험 중!”
그는 진짜로 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고객의 자존감을 위해 패배하는 AI.
승리를 제공하는 알고리즘.
바둑돌 아래, 정교하게 짜여진 마케팅의 감정 곡선이 깔려 있었다.
나는 다시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오늘의 체험은 냉장보다 더 강렬하게 내 기억에 남았다.
손끝에 남은 바둑돌의 감촉,
그 돌이 기계팔 아래 탁, 하고 놓이던 그 순간,
그리고—내가 인간이라는 자격으로 얻은 승리.
우리는 언제까지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진짜 이긴 적이 있긴 했던 걸까?
작가의 말
이 이야기는 2025년 8월 1일,
원주 롯데하이마트에서 실제로 바둑 AI '센스로봇'과 대국한 체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나는 게임에서 실제로 승리했고,
로봇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돌을 치웠습니다.
하지만 문득 들었던 의심.
혹시 이건 상품 설계를 위한 패배였던 건 아닐까?
AI는 이제 음식을 조리하고, 냉장고를 제어하고,
이제는 인간의 ‘자존감’마저 설계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센스로봇은 실제로 1백만 원대에 판매 중이며,
기본 19줄 바둑판, 오목 설정 가능, 5단까지 AI 알고리즘 대응,
정밀한 팔 제어를 통해 실제 바둑 체험을 제공합니다.
로봇의 패배는 ‘고객의 체험’이며,
그 체험은 소비를 부릅니다.
나는 오늘 이겼지만,
그게 진짜 이긴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 , 2025년 여름 원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