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뒷문에서

물방울

by 마루

창고 뒷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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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등 뒤로 손전등을 비추자, 벽에 걸린 낡은 삽들이 갑자기 긴 팔을 뻗은 거인들처럼 보였다. 우리의 그림자가 그 삽자루에 닿자, 삽날은 달빛에 스르르 녹아 내리는 듯했다.

“저기 봐.”

수덕이 창고 천장을 가리켰다. 틈새로 스며든 달빛이 물방울을 타고 내려와 바닥의 기름 얼룩과 부딪쳤다.

똑—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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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실에서 익숙하게 듣던 바로 그 소리였다.

“저 물방울이 매일 밤 10시에 멈추는 이유를 알아?”

그가 주머니에서 녹슨 열쇠를 꺼내 바닥에 내려쳤다. 챙랑!

멀리서 철문 여는 소리가 울려 왔다.

“경비 교대 시간이야. 그 10분이 너희들의 호흡 공간이지.”

동기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수덕은 왼팔 소매를 걷어 올렸다. 흉터가 나뭇가지처럼 뻗은 피부 위로, 파란색 숫자 7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내가 일곱 번째 희생자였으니까.”


손전등의 속삭임

그가 노란 손전등을 켜 벽에 비추었다. 토끼와 거북이 그림자가 달리기 시작했다. 거북이 등딱지의 숫자 7이 점점 커지더니, 빛으로 된 문으로 변했다.

“고참이 샤워기 고무줄을 건드릴 때마다, 창문에 세 손가락을 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병영 건너편 창문이 깜빡였다.

깜—박, 깜—박, 깜—박

세 번의 빛. 고요한 어둠 속 눈 깜빡임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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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야. 우리만의 모스 부호지.”

수덕이 테이프 레코더를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음 사이로 여자 목소리가 스쳤다.

“7호! 우리 아기가 ‘칠’이라고 말했어!”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 새끼야. 태어나서 처음 내뱉은 말이 ‘아빠’가 아니라 ‘칠’이었대.”


휴가증이라는 상처

그가 주머니에서 찢어진 종이 조각을 꺼냈다. 휴가증의 반쪽이었다.

유효기간은 이미 지난 가을이었다.

“작년 이맘때, 한 고참이 내게 했던 말이야.”

그는 종이 조각을 입김으로 불었다.

‘네 몸은 찢어도 네 의지는 못 찢어.’

휴가증 뒤편에 새겨진 문장이 드러났다.

[의지는 네가 찢은 내 살에 새겨져 있다]

“다음 날, 내가 그 놈 침대 맡에 이걸 놓았지.”

종이 조각이 바람에 날려 창고 벽에 달라붙었다.

그 위로 물방울 한 방울이 떨어져 번졌다.

바로 숫자 7이 쓰여 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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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면을 기다리는 파도

수덕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들었어?”

우린 고개를 저었다.

“파도 소리.”

그가 테이프 레코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샤워실의 뚝. 뚝. 소리가

빗방울 **찌잉. 찌잉.**을 거쳐

우우웅— 하는 바다 소리로 변했다.

그 바닷소리 속에 아기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고통은 중계되면 변형돼.”

그가 창고 문을 열었다. 새벽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가 봐. 10시 10분 지났어.”

우리가 돌아서자 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따라왔다.

“잊지 마, 세 손가락.”

우린 등 뒤로 손을 뻗었다.

검지, 중지, 약지.

창고 지붕 위에서 빛이 세 번 내리깔렸다.


다음 날 아침,

사물함 7번에서 눈이 찢겨 나간 아이 사진이 발견됩니다.

그 뒤편엔 글씨 하나—

“엄마 찾아요”



작가의 말


말하지 못한 말들이 오래 살아남는다.

이 이야기는 ‘증언’이 금지된 공간에서 ‘기억’이 어떻게 전파되는지를 그려보고자 했다.


군대는 구조 자체가 침묵을 전제로 유지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나는 그 침묵 안에서 들리는 작은 물방울 소리,

그리고 빛과 손짓으로만 오가는 은밀한 언어들에 집중하고 싶었다.


고참의 명령보다 먼저 들리는 파도 소리,

휴가증의 유효기간보다 오래 남는 찢긴 조각,

그리고 '세 손가락'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깨우는 방식.


그건 나의 과거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현재일 수도 있다.


숫자 7, 손전등, 테이프, 사진...

이야기 속 모든 사물은 기록이자 생존 장치다.

‘말할 수 없어서 남긴 것들’이 결국 가장 오래 남는다는 것—

그 진실 하나를 믿고 썼다.


이야기의 결말은 정해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기록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누군가를 위한 빈 자리에

놓인 편지 한 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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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 편지를 받아줄 마지막 수신자일지도 모른다.


기억해줘.

세 손가락을.


2025년,

말 없는 자들의 소리를 대신 받아쓴 작가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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