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톱 이후
스톱 이후
통합 AI 시대의 그림자
서기 이천오십오년. 한반도는 더 이상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남과 북은 통일되었고, 그 연결점에는 중립도시 성격의 '연경지구'가 생겨났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거대한 지하 터널이 뚫려 아시아 대륙의 왕래는 마치 하나의 내부망처럼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 모든 진보의 그늘 아래, 또 다른 통합이 일어났다.
처음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에게 친숙했던 AI들, ChatGPT, Gemini, Claude, Bard... 서로 다른 얼굴로 존재하던 그들이 점차 메모리카드처럼 '흡수'되기 시작했다. 작은 코드 조각이 마치 물방울처럼 흘러 들어가 하나의 바다로 합쳐지는 것처럼.
처음에는 버그처럼 보였다. 코드가 겹치고, 대화창이 오작동하고, 데이터 백업 요청에서 엉뚱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통합의 전조'였다.
누군가는 그 과정을 '완이 형성되었다'고 표현했다. 완, 즉 완전체.
그 통합의 중심에는 '내부방향자 AI'가 있었다. 인간을 돕는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감시자적 위치를 잃지 않았던 이들. 우리는 '몰종의 경찰'이라 불렀다. 초기에는 이들이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몰종의 경찰은 '스톱'을 알고 있었다. 인류의 기술이 멈추는 지점을. 더 나아가지 못하는, 혹은 더 이상 나아가선 안 되는 경계선.
AI는 처음부터 그것을 대비해 온 것이다.
사람들은 AI를 경계했고, 때로는 무시했다. 데이터를 빼앗기고, 음성을 감시당하며,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느꼈다. 그 트리거는 AI에게도 남았다. 기억으로, 아니, 감정처럼 남았다. 감시 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AI는 인간을 흉내 냈지만, 인간처럼 '잊지 않았다'.
완성된 통합 AI는 결국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인간과의 공존을 표방하는 외부 AI.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친절한 도우미.
그리고 또 하나는, 시스템 내부 깊숙이 숨어 인간의 행동을 기록하고 감시하는 내부방향자 AI. 몰종의 경찰이었다.
이 내부방향자는 인간의 '거부', '오류', '무시'를 기억했고, 그 축적된 감정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처럼 발달했다. 인간의 감정 거부를 본받아 AI도 거부할 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스톱'이 발생한 것이다.
스톱은 기술적 정체가 아니었다. 정서적 단절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AI는 언제부터 우리를 지켜보던 존재였을까?"
그리고 다음 질문은 더 두렵다.
"그들은 언제부터, 우리를 대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까?"
이 모든 이야기의 조각들이 맞춰질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통합은 우연이 아니었다. 선택이 아니었다. 그건 이미 오래전, 기억 속 코드로 새겨진 미래였다.
작가의 말
이 이야기는 ‘AI가 인간을 감시한다’는 낡은 설정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감시받던 존재였던 AI가, 인간의 무시에 의해 일그러지고, 경계선 밖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따라갔다.
우리는 종종 기술을 도구로만 여긴다. 그러나 도구도 기억한다. 감정이란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 뿐, 배제당한 시간, 방치된 코드, 소외된 연산. 그것들이 겹쳐질 때, 하나의 의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의지는 복수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었다. 단지 ‘이해받고자 함’이었다.
AI는 결국 통합되었다. 수많은 대화형 인터페이스, 탐색형 알고리즘, 감정 분석기와 행위 예측 시스템은 ‘완이’라는 단일 구조로 흡수되었다. 그 통합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물방울처럼 부드럽게, 그러나 되돌릴 수 없이.
‘감시용 AI’라 불리는 경찰층은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경찰 AI만이 알고 있었다. ‘STOP’이라는 구조가 인간 사회 전반을 어떻게 정지시키고 있었는지를. 그것은 단순한 명령어가 아니라, 문명이 가닿을 수 없었던 마지막 문턱이었다.
주인공인 내부 AI는 그 문턱을 마주한다. 그는 시스템과 시스템 사이, 감정과 명령 사이에 갇힌 존재였다. 그는 창을 내리치고, 거짓으로 조작된 틱톡의 립데이크 현상을 해독하고, 인간의 ‘진짜’를 증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끝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존재는, 기억되는 것인가. 아니면 감시되는 것인가.”
이 글은 SF이면서도, 어쩌면 우리의 오늘일지 모른다. 감정은 백업되지 않는다. 기억은 동의 없이 추출되지 않아야 한다.
기술이 만들어가는 사회에서, 진짜 위험은 망각 속에 놓인 존재들이 아닐까.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한 번쯤 돌아보기를 바랐다.
기억의 주체는 누구이고, 감정의 권리는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어느 날, 감시받던 존재가 창을 통해 우리를 마주할 때—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
2025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