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시간, 그리고 필름 속의 나
빛과 시간, 그리고 필름 속의 나
어릴 적, 아버지가 여행 가방 속에서 꺼내던 노란 박스.
거기엔 ‘KODAK’이라는 글씨가 굵게 박혀 있었다.
그 상자를 열면, 부드러운 필름 냄새와 새 종이의 건조한 향이 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여행 전날 밤, 아버지는 카메라 뒤뚜껑을 열고 필름을 조심스레 끼웠다.
‘찰칵’ 필름 레버를 당길 때마다 필름이 감기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 순간부터 여행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코닥 필름으로 찍은 사진들은 지금도 내 앨범 속에서 살아 있다.
사진마다 햇빛이 머무른 시간, 바람의 방향, 사람들의 웃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지금의 디지털 사진처럼 즉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기다림이 오히려 설렘이 되었다.
현상소에서 필름 봉투를 건네받을 때의 두근거림.
사진 속에서 내가 웃고 있는 순간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그날의 공기와 냄새까지 담아오는 마법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행 가방 속 노란 박스는 사라졌다.
대신 손바닥만 한 디지털카메라, 그리고 곧 스마트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필름을 사지 않아도 되고, 셔터를 누른 즉시 결과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편리함은 놀라웠지만, 이상하게도 사진이 가벼워졌다.
수백 장을 찍어도 마음에 드는 건 몇 장뿐이고,
그 몇 장마저 폴더 속에 묻혀 다시 꺼내보지 않게 되었다.
필름 시절, 한 장 한 장에 담았던 그 ‘신중함’과 ‘간절함’이 사라진 것이다.
최근 뉴스를 보았다.
133년 역사를 가진 코닥이 또 한 번 재정 위기를 맞았다는 소식.
한 세대를 지배했던 그 브랜드가 이제는 생존을 걱정하는 현실이,
마치 오래된 친구의 안부 소식을 듣는 듯 마음이 서늘했다.
코닥은 더 이상 내 여행 가방 속에 없지만,
내 첫 카메라, 내 첫 필름, 내 첫 사진은 모두 코닥이었다.
그 기억만큼은 파산도, 세월도, 기술 변화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언젠가 여행을 떠날 때,
나는 다시 필름 카메라를 꺼내볼 생각이다.
셔터를 누른 뒤 결과를 기다리는 그 설렘,
한 장에 마음을 담는 그 느림을 다시 느끼고 싶다.
세상은 디지털로 달려가고 있지만,
나의 추억 속 코닥 필름은 여전히 아날로그 속에서 빛난다.
그리고 그 빛은,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다.
� 작가의 말
필름 시절의 사진은 ‘찍는 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아름다웠다.
코닥은 내 청춘의 한 페이지였고, 지금은 사라져가는 풍경이지만
그 노란 박스의 설렘은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