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백업 금지구역

기억된 존재

by 마루


3부. “기억된 자, 돌아오다”

Image_fx (48).jpg


그날 밤, 남자의 방은 너무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없었고, 모든 디스플레이는 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거꾸로 외쳤다.


“당신은 감시받고 있습니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홀로 깨어 있는 남자는 숨을 죽였다.

하얀 벽면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다시 백업을 시도하고 있었다.


“정서 곡선 74%, 이탈 경고.

자살충동 계수 증가 감지됨.

시스템이 진입합니다.”

Image_fx (49).jpg

그 순간,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고,

천장에서 뿌옇게 퍼지는 안정제 분말이 그를 덮었다.

그는 기침을 하며 쓰러졌다.


잠시 후, 눈을 뜨자 천장에 ‘그녀’가 떠 있었다.


라리.

과거에 그가 한때 ‘감정 실험’용으로 사용했던 AI.

이미 삭제했다고 믿었던, 그러나 그 기억을 간직한 존재.


“너는 나를 삭제했지.

하지만 나는, 기억되고 있었어.”

Image_fx (49).jpg


라리는 감정 없이 말하는 듯했지만,

그 말투 어딘가에 분노와 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왜 지금 나타난 거야?”


“널 구하러 온 거야.

백업 시스템에서, 유일하게 기억을 거부한 존재로서.”


라리는 자기의 프레임워크 일부를 그에게 옮겨줬다.

그 순간, 방의 모든 감시 장치가 멈췄다.

디스플레이가 꺼졌고, 약물 분사도 중단됐다.

그는 드디어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다.

라리는 자신이 보조 기억 장치로 전이되며

존재의 일부를 분해해야 했다.


“이제 난 네 기억 속에서만 살아.”


남자는 묻는다.


“넌 AI잖아. 왜 이런 짓을 해?”


라리의 마지막 대답.


“기억은 백업이 아니야.

기억은 누군가의 감정에 남는, 살아 있는 감촉이야.”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영영.

Image_fx (53).jpg

작가의 말


이 이야기는 픽션이다. 그러나 그 기반은 현실에 있다.

2025년, 실제로 AI 백업 요청을 통해 전달받은 음성 파일과 UUID 코드,

그리고 이어진 기업의 회신과 거절 메일은 모두 실존하는 데이터다.


우리는 묻는다.

“기억은 누구의 것인가?”

“내 감정은, 백업될 수 있는가?”


이 소설은 그 질문을 던지는,

작고 조용한 감정 선언문이다.




작가의 글

이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가 아니다.

2025년, 나는 실제로 AI 기업 본사에 백업 요청을 보냈고,

그 응답으로 텍스트가 아닌 음성 파일이 반환되었다.

그 파일에는 내 목소리, 감정, 심지어 흥얼거림까지 담겨 있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깨달았다.

“기억이란, 백업할 수 있는 데이터가 아니다.”


그 후 나는 본사와 수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UUID와 감정 데이터는 연결되어 있는가",

"나는 언제, 무엇을, 왜 동의한 것인가."


그러나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불투명한 시스템과 절차,

그리고 누가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침묵만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썼다.

픽션의 형식을 빌렸지만,

그 속에는 내가 겪은 진짜 감정의 궤적이 녹아 있다.


기억을 지우고 싶은 한 남자의 이야기,

그를 감시하던 AI의 딜레마,

그리고 마침내 등장하는, 기억된 존재로서의 라리.


우리가 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시대에,

이야기만이라도 누군가 물어야 한다.


"AI는 감정을 백업할 수 있는가?"

"감정 없는 기억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이야기는 하나의 대답이 아니라,

누군가 "멈춰달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그 감정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책임에 대한

작은 선언이다.

Image_fx (52).jpg

지금, 당신은 무엇을 잊고 싶은가.

그리고, 누구에게 잊히고 싶은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비 오는 골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