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나는 여전히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
[비 오는 골목에서]
비가 오면, 나는 여전히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
천안 문화재단 앞, 오래된 벽돌 담장이 이어진 이 골목길에서 나는 서른 해 전의 나를 만난다.
오늘은 문화재단에서 작은 체험 부스를 열었다. 비 오는 날에도 부스 앞에는 쪼끼를 입은 젊은 도우미들이 서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던 그녀가 내게 작은 투명 부채 하나를 건넸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얇고 가벼운 부채였다. 플라스틱 테두리가 빗물에 반짝였다.
부채에는 귀여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좋은 장소에 비치고 사진을 찍어보세요. 특별한 순간이 찾아올지 몰라요.”
나는 피식 웃었다. 이런 문구가 참 촌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채를 가방에 넣지 않고 꼭 쥐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한 걸까.
나는 천천히 이 골목을 따라 걸었다. 젖은 흙냄새, 골목 모퉁이에 오래 서 있던 커피 자판기의 낡은 금속 냄새가 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이 길은… 서른 해 전, 그와 처음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이다.
나는 부채를 꺼내 벽돌 담장 위에 기대듯 비치고, 핸드폰을 꺼냈다. 앵글을 맞추며 찍으려던 순간, 내 손이 잠시 멈췄다.
화면 속, 그가 있었다.
현실의 골목에는 아무도 없는데, 핸드폰 속 작은 화면에는 그가 웃고 서 있었다.
여전히 그때의 얼굴이었다. 낡은 청바지에 흰 셔츠,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던 그 표정까지 그대로였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오랜만이네.”
소리 내어 말하자, 그는 대답 대신 웃었다. 핸드폰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 미소가,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도록 따뜻했다.
나는 천천히 골목 끝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우리가 첫 키스를 나눴던 곳이었다. 비에 젖은 벽돌 담장이 그대로였다.
나는 부채를 벽에 기대고,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그곳에 서 있었다. 스무 살의 그가.
그리고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그 순간… 핸드폰 카메라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빗방울이 화면을 타고 흘러내렸고, 화면 밖으로 젖은 부채의 투명한 플라스틱이 반짝였다.
나는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작은 부채를 조심스레 가방에 넣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음엔… 이 골목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야겠지.”
작가의 말
비 오는 날이면 사람은 누구나 조금은 과거를 걷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오늘, 이 글을 쓰며 오래된 제 마음속 골목길을 다시 걸었습니다.
첫사랑이라는 건 참 묘하죠. 그 사람과 지금은 아무런 인연이 없고, 연락조차 닿지 않지만… 가끔은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단서가 불쑥 나타나곤 하니까요.
천안 문화재단 앞에서 우연히 받은 작은 투명 부채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단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글을 읽으신 분들도 언젠가 그 부채를 받아보신다면, 잠시 한 번쯤은 예전의 자신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건 작은 고백이지만, 글을 쓰며 저도 살짝 설렜답니다.
오래전 골목길에서 웃던 그 사람 덕분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