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안 불이 꺼지고, 스크린 위 첫 장면이 흘러나왔다.
공기 속에 은은히 배어 있던 팝콘 냄새가 사라지고, 대신 묘한 서늘함이 피부에 와 닿았다.
영화는 시각장애를 가진 장인 임영규의 고요한 일상에서 시작했다.
대사도 크지 않았고, 화면은 담백했지만, 그 안에 감춰진 공백이 내 귓가를 무겁게 울렸다.
나는 스크린에 비친 그의 손끝을 오래 바라보았다.
낡은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 금속이 부딪히는 미세한 울림. 그 소리는 단순한 작업의 리듬이 아니라, 40년 전 사라진 아내를 향한 기억의 박동처럼 들렸다.
보이지 않는 얼굴을 대신하는 건 그 손끝의 흔들림, 그리고 침묵 속에 스며든 숨소리였다.
이 영화가 내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했던 건, 끝내 어머니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방식이었다.
관객은 늘 무언가를 보며 안도하길 원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보이는 것을 걷어내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상상을 강요했다.
화면 속 사람들의 증언은 서로 엇갈렸고, 그녀의 얼굴은 매번 다르게 그려졌다.
때로는 온화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아예 공허한 그림자로만 남았다.
나는 그 순간, 장례식장에서 맡아온 향 냄새를 떠올렸다.
의례가 시작되면 언제나 공기를 가득 메우던 묵직한 향내.
그 냄새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폐 속 깊이 스며들며 죽음의 존재를 확실히 알려주곤 했다.
영화 〈얼굴〉 속 보이지 않는 얼굴이 던지는 공허감은, 그 향 냄새가 내 몸에 남기던 잔향과 똑같았다.
화면이 전환될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도 묘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발자국이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오래된 공장의 삐걱거림. 나는 귀를 막고 싶으면서도 끝내 놓을 수 없었다.
마치 죽음을 대면할 때 들려오는 곡소리와 정적이 번갈아 밀려오는 것처럼. 영화는 귀로 들리는 모든 것을 통해 얼굴의 부재를 더 깊게 체감하게 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나는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손에 쥔 물병이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쉽게 삼킬 수 없었다.
공허와 불편함이 혀끝까지 차올라, 목구멍이 막힌 듯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끝내 보지 못했기에, 오히려 나는 더 많은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마주했던 울고 있는 얼굴, 웃음을 억누른 얼굴, 공허한 눈빛. 영화는 결국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너는 어떤 얼굴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느냐.”
영화관을 나서는 길,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순간 나는 장례식장 밖에서 새벽 공기를 마시던 기억과 겹쳐졌다.
뜨겁게 타던 향이 꺼지고 난 뒤, 싸늘하게 남아 있던 공기. 그 공기 속에서 나는 늘 내 얼굴을 더듬어야 했다. 무표정인지, 슬픔인지, 혹은 그저 지쳐 있는 얼굴인지.
〈얼굴〉은 나에게 단순한 미스터리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더 깊은 진실을 바라보게 하는 체험이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크다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내게 남긴 가장 차가운 울림이었다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나오던 순간, 나는 마치 오랜 장례의식에 다시 참여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향 냄새, 삐걱거리는 소리, 차가운 공기, 목에 걸린 침조차 삼키기 힘들었던 감각까지.
영화는 내 오감을 통해 죽음을 체험하게 했고, 그 속에서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했다.
*〈얼굴〉*은 결코 친절하지 않은 영화다.
얼굴을 지우고, 결론을 숨기며, 관객을 끝내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 나는 오히려 내 기억과 마주했다.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내 삶에 남긴 무게, 그리고 그 무게가 결국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왔다는 사실.
나는 이 글을 통해 영화에 대한 후기를 남기고 싶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의 얼굴을 다시 돌아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 미완의 질문 속에서,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답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어떤 얼굴로 기억될 것인가.”
이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 향 냄새처럼 오래 내 안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