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문화원에서 만난 작은 교차점
봄바람 속의 한시, 그리고 클래식
柳岸桃蹊渚氣浮
鳥語苦吟春工忙
東風與我爭何事
不自休休鬢已蒼
원주문화원에서 만난 작은 교차점
연주회를 기다리는 시간은 묘하게 길다. 원주문화원 2층, 대기실에 앉아 있던 나는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보다도 벽에 걸린 한 폭의 족자에 먼저 시선이 머물렀다. 굵고 단단한 붓끝이 적어내린 네 줄의 시(詩). 그곳에는 버드나무와 복숭아꽃, 안개와 새소리, 그리고 봄바람이 담겨 있었다.
잠시 후 울려 퍼질 바이올린의 선율과 피아노의 화음은 아직 준비 중이었지만, 이미 나는 한시 속에서 또 다른 음악을 듣고 있었다. “柳岸桃蹊渚氣浮…” 버드나무 언덕과 복숭아꽃 길에 피어오르는 안개는 현악기의 떨림 같았고, 새의 울음은 오보에의 음색처럼 섬세했다.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은 긴장으로 손을 풀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곧 시인의 고뇌와 닮아 보였다. 시 속에서 새들이 애써 울음을 토해내듯, 연주자들도 악보의 숨결을 관객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봄은 분주하고, 예술은 그 분주함 속에서 태어난다.
나는 문득 시인의 마지막 구절이 마음을 찔렀다. “不自休休鬢已蒼”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사이, 머리는 이미 희어졌다. 끝내 쉬지 못한 열정과 시간의 흔적. 연주자들의 무대도, 아마 그런 생의 기록일 것이다.
잠시 뒤, 대기실 문이 열리고 클래식의 첫 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내 마음엔 이미 붓글씨의 선율이 울리고 있었다. 한시와 클래식, 동양과 서양의 예술이 어색하지 않게 어깨를 맞댄 순간. 그것은 원주문화원 2층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작은 교차점이었다.
작가의 말
때로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의 고요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날 나는 한시와 클래식이 같은 숨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한시(漢詩)를 붓글씨로 쓴 족자
柳岸桃蹊渚氣浮 鳥語苦吟春工忙 東風與我爭何事 不自休休鬢已蒼
柳岸桃蹊渚氣浮
버드나무 언덕, 복숭아꽃 길가에 물안개가 아득히 피어오르고,
鳥語苦吟春工忙
새들의 지저귐은 시인의 괴로운 읊조림과 섞여, 봄은 바쁘게 일을 하고 있다.
東風與我爭何事
동풍(봄바람)은 나와 무슨 일을 다투는가?
不自休休鬢已蒼
나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사이, 어느덧 머리에는 흰 서리가 내렸다.
봄날의 풍경(버드나무, 복숭아꽃, 새소리, 안개)을 묘사하면서도, 인생의 무상함과 세월의 빠름을 덧붙인 시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시인은 젊음이 덧없이 사라짐을 깨닫고, 바람(동풍)조차 세월을 재촉하는 듯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錦老筆先生詩 (금노필 선생의 시)
青谷金南德 (청곡 김남덕)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즉, 원작시는 금노필 선생의 작품이고, 글씨는 청곡 김남덕 선생이 쓴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