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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돌리던 아이들

선풍기

by 마루

여름을 돌리던 아이들


감자공주 단편소설


밤이 내려앉은 골목 끝,

세 대의 선풍기가 나란히 버려져 있었다.

누렇게 빛이 바랜 몸통, 희미해진 상표 스티커,

날개 사이엔 먼지 대신 여름의 기억이 끼어 있었다.


“야… 우리 이제 진짜 끝인가 봐.”

가장 오래된 노란 선풍기 ‘금돌’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삐걱대는 모터소리처럼 탁했지만,

어딘가 체념이 묻어 있었다.


“에이, 설마. 재활용센터 가면 다시 태어날 수도 있잖아.”

파란 몸통의 ‘바람이’가 애써 희망을 말했지만,

자기 날개 한쪽이 이미 부러진 걸 본 이상

그 말에는 힘이 없었다.


“나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아이방에 있었어.”

흰 선풍기 ‘하양이’가 조용히 말했다.

“매일 밤, 그 애가 잠들 때마다 나한테 ‘잘 자’ 했거든.”


“그 애는 이제 에어컨 키고 자겠지.”

금돌이 한숨처럼 웃었다.

“요즘은 다 그렇잖아. 리모컨 하나면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는데

누가 우리 같은 걸 찾겠냐.”


그때 쓰레기봉투 속에서 빈 플라스틱병들이 서로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마치 ‘다음 세상에서 보자’고 인사하는 것처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멀리서 쓰레기차의 노란 불빛이 반짝였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드르륵… 드르륵…”


바람이가 작게 말했다.

“얘들아, 혹시… 우리가 다 같이 한 번만 더 돌아볼까?”


금돌과 하양이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세 대의 선풍기 날개가 동시에 살짝 움직였다.

플러그는 꽂혀 있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잉—


하양이의 날개가 느리게 돌았다.

그 바람이 금돌을 스쳤고, 금돌은 다시 바람이를 밀었다.

그들의 마지막 순환.

짧았지만 아름다운 순서였다.


“여름 잘 보냈다.”

“다음 세상에서는 선풍기 말고, 바람 그 자체로 태어나자.”


그리고,

쓰레기차의 팔이 길게 뻗어 그들을 하나씩 품었다.

철컥, 철컥—


이제 그들은 회색 철창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날 밤,

그 골목 끝에서는 미세한 바람이 잠시 불었다.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 만큼.


그건 분명,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든 바람이었다.

“잘 가요, 여름아.”

그 말이 공기 속에서 조용히 흩어졌다.


작가의 말

한때는 가족의 한가운데에 있던 물건들도,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뒤편으로 밀려나죠.

그래도 분명 그들도 누군가의 계절을 지켜준 작은 영웅들이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왜 저 버려진 선풍기들이 그렇게 오래 눈에 밟혔는지.

그냥 여름이 끝나서 버려진 고철 덩어리일 뿐인데,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마음이 묘하게 멈춰 섰다.


아마 그건,

사람이든 물건이든 ‘쓸모’를 다한 순간의 얼굴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조용히 꺼져가는 것들,

그래도 마지막까지 바람을 만들어보려는 그 모습이

왠지 사람 같다.


그래서 글을 썼다.

그저 사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계절을 함께 보낸 작은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다 해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 자신이 가끔은 낯설다.

세상은 늘 새것을 향해 달려가는데

나는 왜 늘 버려진 것들 곁에서 서성이게 되는 걸까.

그래도 어쩌겠나,

내 글은 늘 그런 것들에서 시작되니까.



가끔 이런 버려진 것들 속에도

사람보다 따뜻한 이야기가 숨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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