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그리고 56kbps의 기억”
브라운관을 넘어, 모뎀의 파동 위로 — “이승희, 그리고 56kbps의 기억”
글: 감자공주
1. 어느 봄날의 충격
1998년, 나의 중학교 교실은 ‘소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담배보다 빠르게 퍼지는 그것은 “미국에서 모델이 왔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히 말하면 플레이보이 출신의 한국계 누드 모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름은 이승희.
그 시절, 인터넷은 아직 집집마다 없었다. 있더라도 56kbps 모뎀으로 ‘띠~뚜두둥’ 접속하던, 엄마가 전화 받으면 인터넷이 끊기던 시대였다. 우리는 컴퓨터 앞에 앉아 넷스케이프를 켜고, 몇 줄의 텍스트와 깨지는 이미지 파일을 기다리며 그녀를 보았다. 그러니까, 단순히 ‘누드 모델’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처음으로 접한 낯선 문화의 상징이 바로 그녀였다.
2. '이승희'라는 현상
이승희는 단순한 유명인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 사회가 꺼내기 어려워했던 것들 — 성, 여성, 표현의 자유, 국적의 경계 — 그 모든 것을 한 몸에 담고 있었던,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녀는 1996년 플레이보이에 등장하며 미국 내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시선을 흔들었고, 1998년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영화 『물 위의 하룻밤』에 출연했다. 그 출연 하나만으로 보수적인 매체 환경이 술렁였다.
신문은 그녀를 ‘도전적인 여성’이라 부르면서도, 동시에 선정성의 경계에서 경계했다. 일부는 “한국 이미지를 훼손한다”고 말했고, 일부는 “표현의 자유”를 논했다. 하지만 그 어떤 비평보다도 강력했던 건… 우리가 그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였다.
3. 우리는 왜 그녀를 보았는가?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왜 그녀에게 열광했는가? 혹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왜 숨죽이며 그녀를 찾아봤는가?
그건 단순히 그녀가 ‘누드’를 찍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우리가 막 접속하기 시작한 “바깥 세상”의 상징이었다. 케이블 TV, 외국 영화, 윈도우 95, 인터넷, 에로티시즘, 디지털 이미지… 모든 것이 동시에 밀려오던 그 시절, 이승희는 처음으로 해외를 품은 여성이었다. 우리가 아직 입 밖으로 꺼내기 두려웠던 욕망, 자유, 주체성, 문화적 혼종성을 그녀는 몸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낯설었고, 그래서 더 강하게 끌렸다.
4. 그 이후
이승희는 곧 한국을 떠났고, 영화도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은 검색 포털보다 PC통신 하이텔, 천리안, 유니텔 게시판에 더 오래 남았다. 하지만 그 짧은 한때, 그녀는 분명 시대의 ‘경계’를 열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GPT를 통해 ‘이승희’를 다시 꺼내보는 나는 묻고 싶다.
그녀를 둘러싼 그 열기 속에 있었던 건 과연 ‘선정성’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열망했던 변화의 문을 살짝 열어본 경험이었을까?
5. 작가의 말
플레이보이 모델이라는 단어는 자극적이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녀를 둘러싼 시대의 감정이다.
90년대 후반, 세기말의 혼돈과 인터넷의 낯섦.
그 속에서 처음으로 “바깥 세상” 을 보게 된 우리.
이승희라는 이름은 어쩌면, 우리가 처음으로 ‘자기 표현’이라는 개념을 배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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