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차창에서 본 원주의 풍경
아주 오래전, 고속버스 옆면에는 달리는 경주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그 버스를 '개그린(Gagreen)'.라 불렀다
지금처럼 네온사인이 번쩍이던 시대도 아니었고, 버스 안에는 안내양이 있었다.
“표 보여주세요.”
그녀의 손끝에는 펀치가 달린 검정 가죽 가방이 매달려 있었고,
표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리며 작은 금속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따뜻했다.
엔진 옆 명당자리에 앉으면 겨울에도 엉덩이가 따뜻했다.
담배 연기와 섞인 매연 냄새,
기사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이미자의 노래,
그리고 휴게소에서 사 먹던 어묵 한 꼬치.
그 시절엔 오뎅 국물에 하루의 피로가 풀렸고,
순대 한 입에 사람들의 마음이 이어졌다.
현금 대신 회수권으로 어묵을 사 먹던 안내양들은
“삥땅 좀 쳤다”라며 웃었지만,
그건 생계를 버텨내는 작은 숨구멍이었다.
시간이 흘러 기차로 이어졌다.
중앙선을 따라 치악산 자락을 돌아 올라가면
길게 뻗은 금대철교가 나왔다.
디젤기관차는 숨을 몰아쉬며 철교를 건넜고,
객실 창문 틈으로는 매연이 스며들었다.
기침이 나도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기차는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낭만이었다.
그런데, 세월은 그렇게 쉽게 달리지 않았다.
중앙선이 폐선된 후, 원주는 ‘경관열차’라는 이름으로
추억을 되살리려 했다.
그러나 얼마 전, 그 열차가 시험 운행 중 무너져 내렸다.
기관차는 망가지고, 시는 손해를 봤으며,
결국 ‘추억을 복원하려던 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추억의 파편’만 남기고 말았다.
누군가는 “요즘 열차는 AI로도 돌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문득, 그 옛날 안내양의 펀치 소리를 떠올린다.
“딸깍.”
그건 단순한 검표가 아니라,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체온 같은 리듬이었다.
지금의 원주에는 더 이상 강아지 버스도, 펀치 소리도 없다.
그러나 그 따뜻한 기억들은
여전히 도시의 낡은 철길 위를 달리고 있다.
작가의 말
기술은 빠르게 달리고, 사람은 느리게 따라간다.
그 사이의 틈에서 나는 늘 카메라를 든다.
버스와 기차, 그 안의 사람들,
그리고 사라져가는 ‘정겨움’을 기록하기 위해.
강아지 버스의 웃음을 닮은 그 풍경을,
다시 한번 렌즈 안에서 달리게 하고 싶다.
“개 그린 버스, 그리고 한국의 첫 사치 — 코리아 그레이하운드 이야기”
1969년, 서울역 근처 동자동에 낯선 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버스 옆에는 달리는 개 그림이 있었고,
영문으로 KOREA GREYHOUND라 쓰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개 버스”라 불렀다.
그때 한국은 아직 군용 트럭을 개조한 시내버스가 도로를 달리던 시절이었다.
흙먼지와 디젤 냄새 속에서도 사람들은 버스가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창문이 둥글게 이어진 은색 버스가 나타났다.
안에는 에어컨이 있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가정에서 선풍기도 귀하던 때,
버스 안에서 찬바람이 나오는 건 거의 ‘기적’이었다.
좌석 밑에는 에어 서스펜션이 달려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승차감은 마치 외국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레이하운드는 미국 본토에서 퇴역한 중고차량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이동수단이었다.
버스 안에는 화장실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고속도로는 짧았고,
휴게소 오뎅과 커피 한 잔이 더 익숙했기에
그 화장실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이 버스는 사실,
미국의 ‘Greyhound’ 본사와 ‘코리아나관광진흥’이 합작해 만든
**‘코리아 그레이하운드(Korea Greyhound)’**의 작품이었다.
1970년, 이들은 미국에서 GMC PD-4501 시닉크루저 파노라마 데커형과
PD-4104 하이웨이 트래블러 싱글 데커형 버스를 도입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고속버스 시대’를 열었다.
‘코리아 그레이하운드’의 터미널은
지금의 **게이트웨이 타워 자리(서울역 인근 동자동)**에 있었다.
버스 옆에는 늘 푸른 제복의 안내양이 서 있었다.
그녀는 모자를 눌러 쓰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그레이하운드 버스입니다.”
그 한마디에 사람들은 마치
외국으로 여행 떠나는 기분을 느꼈다.
고속도로는 짧았지만,
그 설렘은 지금의 비행기표보다 더 크고 따뜻했다.
그레이하운드는 1978년 중앙고속에 합병되면서
그 화려했던 이름을 내려놓았다.
운행권이 넘어가고, 차량들은 중앙고속의 색으로 다시 칠해졌다.
남은 버스들은 몇 년 더 달리다
1983년에 대부분 퇴역했고,
몇 대는 캠핑카로 개조되어
어딘가의 들판 어딘가에서 마지막 바람을 맞았다.
그레이하운드의 은빛 껍질은 사라졌지만,
그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그 개 그린 버스 말이야?”
그 한마디에 세대가 통했다.
누군가는 그걸 “개그린(Gagreen)”이라고 잘못 들었다며 웃었고,
누군가는 사우디에 진출했다가
‘개는 불결하다’는 이유로 그림을 지웠다는 일화를 전했다.
지금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에서는
‘Greyhound’가 여전히 고급 버스 브랜드로 통한다.
그 나라의 경제 수준이
우리의 1960~70년대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개 그린 버스”는 한국의 근대화가 달리던 상징이었다.
고속도로 위의 개는 단순한 로고가 아니었다.
그건 ‘달리기 시작한 한국’의 초상화였다.
카메라 렌즈로 그 시절을 보면
엔진의 매연보다 더 선명하게 남는 건 사람의 표정이다.
그 버스 앞에서 활짝 웃던 안내양,
에어컨 바람에 놀라던 승객들,
그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첫 여행자들’이었다.
그레이하운드는 이제 사진 속에만 남았지만,
그때의 바람, 설렘, 그리고 달리는 소리는
아직도 내 기억 속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