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백미러 속의 유령: 1979–1980

용산, 멈춰버린 신호등 아래서

by 마루

백미러 속의 유령: 1979–1980


(제1장: 용산, 멈춰버린 신호등 아래서)

Rearview_Mirror_Specter_2.jpg


그날도 특별한 이야기를 하려고 만난 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저녁이었고, 밥을 먹고, 지인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운전석에는 일흔을 훌쩍 넘긴, 이제는 눈가에 검버섯이 내려앉은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서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차는 용산을 지나고 있었다.

밤의 용산은 늘 그렇듯 기묘하게 조용했다.

낮의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는 도로 위를 미끄러지는 타이어 소리만 낮게 깔렸다. 라디오는 꺼져 있었다.

Rearview_Mirror_Specter_3.jpg

뉴스도, 음악도 나오지 않는 차 안은 진공 상태 같았다.

오직 계계판의 파란 불빛만이 운전대를 쥔 그의 앙상한 손등을 푸르스름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기만 하던 그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여기가 말이야… 예전엔 밤에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데가 아니었어.”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Rearview_Mirror_Specter_4.jpg

지금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마주치면, 어렵게 흘러나오기 시작한 이 이야기가 다시 그의 목 깊숙이 숨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살짝 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냥 매끄러운 도로지. 근데 그땐…

여기서 차 세우라는 소리 한 번 나오면 인생이 바뀌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어.

아니, 인생이 끝나는 사람도 있었지.”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왔고, 차가 멈췄다.

Rearview_Mirror_Specter_5.jpg

브레이크를 밟는 그의 구두 끝이 아주 잠깐,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르신?”

그는 대답 대신 잠시 백미러를 봤다.

뒤차와의 간격을 확인하는 운전자의 습관적인 동작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치 그 거울 너머로 수십 년 전의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눈빛이 깊고 서늘했다.

“운전병들 말이야. 그땐… 운전 잘하는 게 죄가 되기도 했거든.”

신호가 바뀌고 차가 다시 움직였다. 용산을 벗어나며 도로는 점점 넓어졌고, 대화는 거기서 끊긴 채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Rearview_Mirror_Specter_6.jpg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건 대화의 끝이 아니라, 그가 평생을 닫아걸었던 거대한 기억의 문이 열리는 소리라는 걸.

그날 이후, 나는 그와 차를 탈 때마다 의식적으로 백미러를 보게 되었다.

그 거울 속에 무엇이 비치기에 저 노인은 용산을 지날 때마다 핸들을 고쳐 잡는 것일까.

그리고 며칠 뒤, 원주역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그는 비로소 그 '진수'라는 사내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2장: 구파발의 여우, 길의 숨소리를 듣다)

이야기는 60년대 말, 안개가 자욱했던 구파발에서 시작된다.

당시 구파발에서 진수의 아버지는 ‘길 귀신’이라 불리는 운송업자였다.

지도는커녕 이정표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었지만, 아버지는 새벽 안개 속에서도 엔진 소리와 타이어에 닿는 자갈의 감촉만으로 차가 어느 골짜기를 지나는지 맞혔다.

진수는 그런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핸들을 잡았다. 열 살도 되기 전이었다.

“진수야, 운전은 눈으로 하는 게 아니다.

타이어를 통해 올라오는 길의 심장 박동을 느끼는 거지. 어디가 무르고 어디가 단단한지, 어느 커브가 너를 뱉어내려 하는지 들어야 해.”

고등학생이 되자 진수는 이미 베테랑이었다.

그는 낡은 재무시(GMC) 트럭의 뻑뻑한 이중 클러치를 깃털처럼 가볍게 다뤘다.

헌병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어도, 진수는 서오릉의 구불구불한 샛길과 논둑길을 이용해 귀신같이 빠져나갔다.

그에게 길은 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였고, 진수는 그 기류(氣流)를 탈 줄 아는 유일한 사내였다.

군에 입대한 진수가 백골부대 화물차 운전병으로 배치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먼지 날리는 보급로를 달리던 어느 날, 보안사 소속의 ‘준이(준위)’라고 불리는 남자가 진수를 따로 불러 세웠다.

그는 진수가 운전하는 트럭 옆자리에 타더니 담배를 한 대 피우며 물었다.

“너, 아까 그 굽잇길에서 브레이크 안 밟더라? 길을 다 외우는 거냐?”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마루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저는 사진가이자 감정기록자입니다. 사람들의 말보다 더 진한 침묵, 장면보다 더 오래 남는 감정을 기록하고 싶어서 카메라와 노트북를 늘 곁에 두고 살고있습니다.

201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3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1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작가의 이전글손과 발이 생긴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