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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유영The Red Spacewalk

중력을 거스르는 선

by 마루

붉은 유영

The Red Spacewalk

제1부: 중력을 거스르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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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ne)

폐창고의 공기는 오래된 비닐처럼 늘어져 있었다.
창문은 있었지만 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빛이 들어오기에는, 이곳의 먼지가 너무 오래 쌓여 있었다.

주인공은 발로 바닥을 밀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발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 쥐의 배설물, 부서진 유리, 그리고 이름 모를 가루들. 창고의 한가운데에는 나무 상자가 무너진 채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유리병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유리병은 이상하게 깨끗했다.
마치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닦아놓고 떠난 것처럼.

뚜껑은 녹슬어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힘을 주어 돌렸다.

딸깍.

그 순간, 병 안에서 붉은 선이 풀려 나왔다.

실이었다.
처음엔 그렇게 보였다. 가느다란 붉은 실이 병 입구를 빠져나오더니,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고, 멈췄다. 그리고—천천히—위로 떠올랐다.

공기가 없다는 듯이.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붉은 실은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창고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알루미늄 기둥을 향해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그리고—
기둥을 통과했다.

금속은 저항하지 않았다. 실은 물처럼 스며들었고, 다시 형태를 유지한 채 빠져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때였다.
주인공의 하복부가 스스로 움찔했다.

의지와 무관한 수축.
항문 괄약근이 기억을 먼저 떠올렸다.

스무 해 전.
뜨겁고, 축축하고, 통제할 수 없던 감각.

그는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붉은 실은 어느새 그의 얼굴 앞에서 멈춰 있었다.

공격하지 않았다.

닿지도 않았다. 단지—기다리는 것처럼 떠 있었다.

마치,
열어주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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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20분의 의식

(The Ritual)

시골 장터의 흙바닥은 비에 젖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 있었고, 아이들은 줄을 섰다.

약장수는 뱀 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비늘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의 손에는 분홍색 알약이 들려 있었다.

“딱 20분만 참으라.”

그 말은 주문처럼 반복됐다.
아이들은 알약을 삼켰다. 물은 없었다.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20분.

처음엔 아무 일도 없었다.
그 다음엔 배가 꼬이기 시작했다.

웃음이 멎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먼저 바지를 내렸다.

아이들은 엉덩이를 깠다.
흙바닥 위에 쪼그려 앉았다.

쏟아졌다.
하얀 회충들이 국수 가락처럼 떨어졌다. 살아 있었다.

꿈틀거렸다. 비명과 울음이 뒤섞였다.

주인공은 울지 않았다.
그의 항문에서 나온 것은—하나였다.

붉었다.
다른 것들과 달리,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약장수의 눈이 잠시 그에게 머물렀다.
아주 짧은 순간.

“약을 먹어도 안 죽네.”

사람들이 혐오하며 피할 때, 주인공은 손을 뻗었다.
유리병이 있었다. 왜 거기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붉은 회충을 병에 담았다.

뚜껑을 닫는 순간,
약장수의 입술이 움직였다.

“다음은… 네 차례구나.”

그 말은 바람에 묻혔다.
하지만 냄새는 남았다.

젖은 흙과 배설물, 그리고—이상하게도—쇠 비린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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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궤도 비행

(The Orbit)

현재.

붉은 실은 창고 안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공전했다.

공격은 없었다. 위협도 없었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머릿속에 장터의 냄새가 스며들었다.
비, 흙, 암모니아.

기억이 아니라—재현이었다.
붉은 실은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과거를 정확한 해상도로 재생했다.

나는 이제 어디로든 들어갈 수 있어.

그 생각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처럼 느껴졌다.

입도 아니고, 항문도 아니야.

붉은 실이 피부 가까이 다가왔다.
살결 위의 솜털이 서늘하게 일어섰다.

네 피부 틈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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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투과하는 침입자

(The Intrusion)

그는 밀실로 도망쳤다.
문을 잠그고, 창문을 막고, 입과 코와 귀를 테이프로 봉했다.

소용없었다.

붉은 실은 문을 통과했다.
벽을 통과했다.
옷을 안개처럼 지나왔다.

그리고—
닿았다.

통증은 없었다.
대신 차가운 수은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무겁고, 느리고, 확실한 이물감.

피부가 열렸다.
찢어지지 않았다. 녹아내렸다.

붉은 실은 장을 향하지 않았다.
그곳은 옛 고향이었다.

새로운 둥지는—척추였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타인의 것이 된 느낌. 의식은 깨어 있었고, 통제는 없었다.

붉은 실은 위로 헤엄쳤다.
뇌간을 스쳤고, 기억의 표면을 훑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아, 이건 죽음이 아니구나.

제5부: 새로운 약장수

(The New Carrier)

거울 속의 그는 변하지 않았다.
상처도, 흉터도 없었다.

다만 눈동자 깊은 곳에서,
붉은 실오라기가 천천히 지나갔다.

공포는 사라졌다.
대신—가벼움이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는 광장에 섰다.

손에는 분홍색 알약이 들려 있었다.
아니—그의 몸에서 배양된 붉은 알들이었다.

사람들이 모였다.
그는 웃었다.

“자, 20분만 기다려 보세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몸이 아주 가벼워질 겁니다.”

어딘가에서,
유리병이 다시 준비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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