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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계단의 밤, 그리고 돌덩이

세상이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뭉개져 있었다.

by 마루


[단편] 40계단의 밤, 그리고 돌덩이

글: 감자공주

세상이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뭉개져 있었다.

알코올은 내 다리를 흐물거리게 만들었고, 머릿속에서는 이명처럼 기차의 경적 소리가 길게 울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원주역 앞이었다.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 그러나 기억만은 멈추지 않는 곳.

나는 비틀거리며 '40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밤이면 다른 공기가 흘렀다. 습하고 비릿한 삶의 냄새. 안개 속에 번지는 붉은 정육점 조명들이 마치 상처 난 짐승의 눈빛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짙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피로가 얼굴에 회반죽처럼 발린 여자였다.

그녀가 휘청이는 내 팔을 낚아챘다. 손아귀 힘이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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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쉬었다 가."

싸구려 향수 냄새가 술 냄새와 뒤섞여 훅 끼쳐왔다.

역겨움이 식도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을 강하게 잡아끌더니, 자신의 가슴팍으로 거칠게 가져갔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고 풀려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유혹이 아니었다.

그것은 절규였다.

"내 가슴 좀 만져봐요."

목소리는 모래를 한 움큼 삼킨 듯 갈라져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그녀는 내 손을 자신의 가슴 위로 더 세게 짓눌렀다.

"돌덩이가 만져진다니까… 진짜 돌덩이가 있어."

물컹한 살결 아래, 손끝에 닿은 것은 정말로 딱딱하고 차가운 이물질이었다.

그것은 암덩어리였을까, 아니면 이 거리에서 굳어버린 한(恨)이었을까.

그 딱딱함이 소름 끼치도록 생경해서, 나는 비명을 지르듯 그녀를 밀쳐냈다.

"이거 놔!"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을 뻔하면서도, 물귀신처럼 다시 손을 뻗어 왔다.

마치 그 돌덩이의 무게를 누구에게라도 나눠주지 않으면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사람처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40계단을 네 발로 기어오르듯 허둥지둥 도망쳤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듯 쿵쿵거렸다.

골목 으슥한 곳에 이르러서야 나는 벽을 짚고 멈춰 섰다.

뱃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우욱… 웩."

바닥에 쏟아낸 오물에서 시큼한 위액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한참이나 허리를 숙이고 속을 게워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밤바람이 식은땀으로 젖은 등을 칼날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끝에는 아직도 그 여자가 말한 '돌덩이'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딱딱하고, 차갑고, 아픈 그 느낌.

문득, 아주 오래전 기억 하나가 심장을 찔렀다.

나의 첫사랑. 순수해서 더 잔인했던 그 시절,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을 때. 그때 내 가슴속에도 저런 돌덩이 하나가 박혔었다.

너무 아파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었던 그 딱딱한 응어리. 세월이 흘러 잊은 줄 알았는데, 그 여자의 돌덩이가 내 안의 돌덩이를 깨워버렸다.

나는 어두운 골목에 웅크려 앉아, 자켓 안쪽, 내 심장이 뛰는 자리를 가만히 쥐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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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도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 돌덩이가 무겁게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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