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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흘리는 비석(碑石)

덮여버린 기록

by 마루

​[소설] 땀 흘리는 비석(碑石) : 덮여버린 기록

​1. 예고 없는 손님

​2025년 12월 24일, 원주의 바람은 유난히 칼칼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로, 휴대폰 화면 속 경제 뉴스는 연일 붉은 숫자를 토해내고 있었다.

환율이 30원이나 폭등했다는 소식은 선물 상자가 아닌 재난 경보처럼 느껴졌다.

​그날, 우연히 차에 태운 노인은 내게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우산동 우산철교 사거리, 이제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선로 근처의 낡은 주택가 이야기를.

​"거기 덕원아파트 앞쪽 골목에 말이야,

깃발도 없고 간판도 없는 집이 하나 있어.

그런데 그 집 방바닥 밑엔 커다란 돌이 하나 박혀 있지.

아주 둥글고 거대한 맷돌 같은 돌이야."

​노인은 마치 나를 선택된 전수자로 여기는 듯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 집은 신기(神氣)가 용하지만, 마을 사람들도 그 존재를 잘 모른다고 했다.

춘천의 어느 유명한 식당이 우물을 덮고 세워졌듯, 그 집 역시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거대한 바위를 그대로 둔 채 방을 올렸다는 것이다.

​2. 맷돌장군의 혼과 일제의 철길

​노인의 이야기는 내 기억 속 '우무개 맷돌'의 전설과 맞닿아 있었다.

맷돌을 옮기려다 죽음을 맞이했다는 맷돌장군.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마을의 기운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며칠 뒤, 홀린 듯 철도 관련 사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원주역을 지나는 철길을 닦을 당시의 기록은 의외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우산동 인근 노반 공사 중, 기계로도 꿈쩍하지 않는 거대한 원형 바위 때문에 설계가 변경되었다는 짧은 주석. '인부들의 사고가 빈번하여 바위를 우회함'이라는 문장은 그 시절의 공포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결국 그 바위는 멀리 가지 못했다.

철길 옆, 지금의 주거지 지하로 스며들 듯 덮여버린 것이다.

그 위에 집이 지어졌고, 사람들은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잊어갔다.

하지만 그 바위는 '땀'을 흘리며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국가에 환란이 닥칠 때마다 차가운 돌 표면에 맺힌다는 그 불길한 습기.

​3. 보이지 않는 징조

​"아저씨, 그 돌이 요즘 땀을 흘려요."

​골목을 서성이던 내게 말을 건 것은 이름 모를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그 집 문틈으로 무엇을 보았는지, 혹은 누구에게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집은 무속인의 집처럼 붉은 등이나 깃발도 없었다. 그저 평범하고 낡은 구옥일 뿐이었다.

​나는 끝내 그 집의 문을 열지 못했다. 보이지 않기에 더 거대해지는 공포. 내 머릿속에서 그 돌은 기차의 진동을 견뎌내며 백 년의 세월을 응축한 채, 어두운 방바닥 밑에서 눅눅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4. 닫히는 화면, 젖어드는 현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휴대폰을 켰다. 환율은 여전히 고공행진 중이었고, 사람들은 제2의 IMF를 속삭이며 불안한 미래를 공유하고 있었다.

​화면을 끄자 검은 액정 위에 내 얼굴이 비쳤다. 어둠 속에 갇힌 그 둥근 바위처럼, 나 역시 보이지 않는 거대한 경제의 파도 밑에 깔려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집 방바닥 아래, 이름 없는 바위는 차가운 눈물 같은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전율하며 휴대폰을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었다.

마치 보지 말아야 할 비밀의 문틈을 서둘러 닫아버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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