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만 원의 유령

정선 카지노

by 마루

38만 원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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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000원짜리 지옥의 문

정선 카지노의 공기는 기묘했다.
술 반입이 금지된 그곳에는 알코올 대신 눅눅한 욕망의 땀 냄새가 배어 있었다.
촬영 시간까지 남은 한 시간. 호기심에 신분증을 내밀고 9,000원을 내고 들어선 그곳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어디에 칩을 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복잡한 테이블들 사이에서
내 시선을 붙잡은 건 숫자가 적힌 커다란 판이 돌아가는 ‘빅 휠’이었다.

나는 2,000원을 40배 숫자에 걸었다.
휠이 멈추고 바늘이 딸깍거릴 때마다 심장이 조여 왔다.

기적처럼 바늘이 40번에 멈췄다.

주머니 속으로 빳빳한 만 원권 여덟 장이 들어왔다.
2,000원이 순식간에 8만 원이 된 순간,
뇌 속에서 짜릿한 경보음이 울렸다.

한 번 더 하면 300만 원도 되겠는데.

주머니 속 8만 원은 뜨거웠다.
나는 그 열기를 억지로 누르며, 도망치듯 카지노를 빠져나왔다.

2. 한우리 식당의 유령

예약된 촬영지는 카지노 인근의 ‘한우리 식당’이었다.
소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식당 한구석,
조명도 닿지 않는 어두운 자리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안주도 없이 소주병만 비우는 그의 눈은
초점 없이 바닥만 파고 있었다.

촬영 중간, 이모님이 혀를 차며 말했다.

“에휴, 또 시작이네. 저 인간도 참 질겨.”

내가 물었다.
“저 아저씨는 왜 저렇게 넋이 나가 있어요?”

이모님은 고기를 자르며 덤덤하게 답했다.

“여기 판이 다 그래요. 저 사람, 5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어.
근데 딱 하룻밤 만에 사고를 쳤지.”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잠시 멈췄다.

“부인이랑 3년 동안 꼬박 모은 전 재산,
38만 원을 여기서 다 날렸거든.”

3. 38만 원의 복선

38만 원.
누군가에겐 소고기 몇 점 값이지만,
그들에게는 인생 전부였다는 말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그 돈 날리고 마누라는 도망가고,
저 남자는 5년째 저러고 살아요.
막노동해서 돈 생기면 또 카지노 들어가고.”

이모님은 말을 덧붙였다.

“여기선 그걸 ‘38만 원의 악몽’이라고 불러요.”

내 주머니 속 8만 원이 다시 꿈틀거렸다.
아까 느꼈던 그 짜릿함이
사실은 저 남자가 빠진 수렁의 입구였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았다.

촬영을 마치고 나오며
나는 만 원권 네 장을 꺼내 남자의 탁자 위에 놓았다.

“사장님, 오늘 운 좋게 돈 좀 땄습니다.
이 4만 원 드릴 테니까, 이제 그만 마시고 집에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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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반복되는 팽이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고맙다는 인사 같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내 마음의 빚을 조금 덜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종업원 아주머니가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

“아유, 총각. 봐봐요.
저 사람 지금 어디 가나.”

유리창 너머,
남자는 ‘집’이 있는 방향이 아니라
방금 내가 도망쳐 나온 카지노의 불빛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내 4만 원은
그의 주머니 속에서 다시 칩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도 카지노의 거대한 휠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2,000원이 8만 원이 되고,
38만 원이 인생을 지워 버리는,
그 잔인한 팽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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