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 캡슐의 배신
[단편] 그 약은 춘천에서 왔다
핑크색 캡슐의 배신
오늘, 원주의 한 식당에서 말끔하게 볶아져 나온 닭갈비를 마주한다.
연기도, 냄새도 옷에 밸 걱정이 없는 쾌적한 식사. 하지만 혀끝에 닿는 매콤한 맛은 순식간에 나를 20대 시절, 춘천 법원 앞 닭갈비 골목의 자욱한 연기 속으로 소환했다.
그때 우리는 젊었고, 춘천은 곧 해방구였다. 학교 모임으로 떠난 그곳에서 우리는 닭갈비 철판을 사이에 두고 앉아, 막걸리 병뚜껑을 술잔 삼아 기울이며 밤이 새도록 청춘을 불태웠다.
문제는 그날 아침부터 내 뱃속이 영 심상치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글대는 붉은 양념의 유혹과 “마셔! 마셔!”를 외치는 분위기 속에서 나약한 위장의 사정 따위를 봐줄 여유는 없었다.
애써 괜찮은 척, 쓰린 속에 막걸리를 들이부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고 뱃속에서 슬슬 전쟁의 서막이 울릴 무렵이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긴 생머리의 후배가 내 사색이 된 얼굴을 용케 읽어냈다.
“선배님, 속 안 좋으세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려는데, 그 애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약봉지였다.
“이거 드세요. 춘천 오면 닭갈비 먹는 게 국룰인데, 탈 나면 안 되죠.”
그 애는 의미심장하게 ‘키’ 하고 웃었다.
그 미소는 마치 수많은 춘천 원정대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베테랑의 여유 같았다. 건네받은 봉투 안에는 정로환 같은 투박한 검은색이 아닌, 아주 예쁜 핑크색 캡슐 네 알이 들어있었다.
색깔의 유혹, 그리고 무엇보다 ‘공짜’라는 강력한 매력 앞에서 나는 주저 없이 그 알약들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후배는 그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묘하게 웃어넘겼다.
안도감은 잠시였다.
춘천 터미널에서 원주행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내 뱃속은 휴전은커녕 전면전을 선포했다.
버스가 어둠을 뚫고 홍천 고개 어디쯤을 지날 무렵이었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해일이 밀려왔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내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는 걸 본 옆자리 남자 후배 놈이 킬킬거리며 옆구리를 찔렀다.
“아이고, 형님. 오늘도 거하게 낚이셨네.”
“뭐? 낚이다니?”
“아까 그 후배가 준 약, 형은 그게 진짜 소화제인 줄 알았어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럼 뭔데?”
“그거 강력한 설사약이잖아요!
아, 형은 바보같이 그걸 좋다고 공짜라고 막 받아먹냐? 그것도 네 알이나!”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배신감에 치를 떨 새도 없었다.
핑크색 악마들은 내 장을 미친 듯이 쥐어짜고 있었고, 나의 항문은 그야말로 폭발 일보 직전, 곽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시속 60km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시험받고 있었다.
저 멀리 ‘홍천 휴게소’ 간판이 구원의 빛처럼 보였다. 버스가 멈추기도 전에 나는 기사님에게로 달려갔다.
“기사님! 저, 저 잠깐만요!
진짜 금방이요!”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화장실을 향해 빛의 속도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변기에 앉자마자 시작된 폭포수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핑크색 캡슐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내 모든 것을 쏟아내고 간신히 정신을 차려 밖으로 나왔을 때, 휴게소 주차장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부르릉—. 저 멀리 붉은 미등을 남기며 비정하게 멀어지는 버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렇게 춘천 닭갈비의 저주와 핑크색 약의 배신 속에, 그 살을 에는 듯한 추운 겨울밤 홍천 터미널 한복판에 버려졌다.
동료들도, 버스도 모두 떠난 낯선 곳에서 나는 밤새 오들오들 떨며 뼈저리게 깨달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특히 춘천에서 오는 핑크색 약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빨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