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 프레임

영정사진앞 V 손짓

by 마루

사진을 오래 찍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버릇이 있다.

사람을 보기 전에 프레임을 먼저 보는 일이다.

표정을 읽기 전에 구도를 보고,

사연을 듣기 전에 빛의 방향을 확인한다.

그건 냉정해서가 아니라,

사진이라는 매체가 작동하는 방식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사진이 진실을 담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진사는 안다.

사진은 진실을 담는 도구가 아니라,

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걸.

어디에 설 것인지,

언제 셔터를 누를 것인지,

무엇을 프레임 안에 넣고 무엇을 과감히 잘라낼 것인지.

그 선택의 총합이

한 장의 사진이 된다.

그리고 그 한 장은

사람의 마음에 너무 빠르게 닿는다.

사진을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1초다.

대부분은 0.1초면 충분하다.

글은 문장을 따라가야 하고,

앞뒤를 오가며 의미를 조립해야 하지만,

사진은 그런 과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감정은 이미 반응을 끝낸다.

불편함, 위화감, 거리감, 혹은 단정.

이 모든 것은

의식보다 먼저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을 본 뒤에 설명을 읽는다.

설명을 읽기 전에 이미

자기 안에서 결론을 만들어 놓은 채로.

사진 속에는 시간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은 의도적으로 잘려 있다.

그 장면이 오기까지의 과정도,

그 장면 이후의 여운도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다.

그날의 공기,

그날의 침묵,

그날의 울음과 망설임은

셔터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남는 건

오직 한 장면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잘려 나간 시간 위에

자기 감정을 올려놓는다.

슬픔을 기대한 자는 슬픔을 요구하고,

규범을 믿는 자는 규범을 들이대며,

불편함을 느낀 자는 불편함을 정당화한다.

그 순간,

사진은 기록이 아니라

판결문처럼 읽히기 시작한다.

사진사로서 가장 무서운 건

사진이 말을 너무 잘해버릴 때다.

의도보다 먼저,

설명보다 앞서,

관객의 무의식에 들어가

하나의 감정을 박아버릴 때.

그때의 사진은

이미 찍는 사람의 손을 떠난다.

아무리 긴 글을 덧붙여도,

아무리 진심을 설명해도,

이미 각인된 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진은 변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이 쌓인 사진사일수록

장면보다 먼저

관객을 떠올린다.

이 사진을 보게 될 사람은

어떤 문화 안에 살고 있는지,

어떤 기억을 안고 있는지,

어디에서 마음이 움찔할지.

이 구도가

누군가에게는 추모로 보일지,

누군가에게는 기념으로 보일지,

그 미세한 경계선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그어본다.

사진사는

현재의 감정보다

미래의 해석을 더 오래 고민해야 한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왜 굳이 그렇게 예민해야 하냐고.

왜 모든 장면에 의미를 부여하느냐고.

하지만 사진사는 안다.

사진은 예민함 위에서만

겨우 윤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한 번 공개된 프레임은

되돌릴 수 없다.

삭제해도 남고,

사과해도 남는다.

각인은

이미 사람들 마음에 찍혔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순간을 남기는 일이 아니다.

그건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하나의 판단을 남기는 일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든다는 건

기술을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셔터를 누르기 전,

사진사는 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 프레임은

누구의 마음에

어떤 흔적으로 남을 것인가.

그 질문을 끝까지 견딜 수 있을 때만,

사진은 비로소

기록이 된다.

그 질문을 건너뛰는 순간,

사진은

의도와 상관없이

낙인이 된다.

그리고 사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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