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위에 서 있던 날

어름치기

by 마루

겨울이 막 시작되던 어느 날이었다.
아직 눈이 오기 전, 하지만 바람에는 이미 겨울 냄새가 섞여 있던 때.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82075940_1045707585787561_5316888849220108288_n.jpg

“얼음 한번 보러 갈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두 살이었다.

방학이었고, 해야 할 일은 없었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같이 가자고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버지는 전날 밤 미리 싸 두었던 작은 가방을 꺼내 보였다.
가방은 무겁지 않았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드는 가방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미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새벽이었다.
버스 정류장은 조용했고, 불빛은 추위에 떨듯 깜박거렸다.
단양사이를 오가는 버스는 하루에 몇 번 없었다.
우리는 한참을 기다렸다.

발끝이 얼얼했지만, 이상하게도 졸리지 않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모른다”는 감각이, 나를 깨운 채로 두었다.

버스는 눈을 이고 왔다.
문이 열리자 찬 공기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우리는 맨 뒤에 앉았다.

창밖으로 마을이 흘러갔다.
자작나무가 서 있고, 검은 송아지가 서 있고,
굴뚝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가 낮게 퍼졌다.
그 풍경들은 버스 안으로 잠깐 들어왔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라졌다.

두 시간이었는지, 세 시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어디서 왔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사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정선에서 내렸다.
아버지의 친구가 전화를 했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한참을 기다렸다.

82290693_1045707612454225_1129489013443395584_n.jpg

흰색 지프차가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목소리는 기억난다.
낮고, 차분하고, 겨울 같던 목소리.

차는 산길로 들어갔다.
길은 점점 거칠어졌고, 차는 흔들렸다.
나는 창문에 이마를 대고 바깥을 보았다.

그리고 강이 나타났다.

생각했던 강과는 달랐다.
넓지도, 깊지도 않았다.
조약돌 위로 물이 얇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텐트가 있었고,
모닥불이 있었고,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낯선 얼굴이었지만,
모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겨울에만 나오는 표정.
조용하고, 느긋하고, 오래된 표정.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다.
아버지가 나를 깨웠다.

“일어나. 얼었다.”

텐트 밖으로 나오자 공기가 얼굴을 베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차가운데, 맑았고,
아프기보다는 투명했다.

강 위에 얼음이 얼어 있었다.

해가 뜨면서, 강 전체가 드러났다.
밤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얼음 아래로 물고기들이 보였다.
퉁가리, 꺽지, 피라미.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얼음 위에 섰다.

발밑이 맑았다.
유리처럼 투명했다.
얼음 아래에서 물고기들이 숨 쉬는 것이 보였다.
물속인데도, 숨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어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름을 깨고, 작살을 들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그림자를 향해 작살이 내려갔다.

짧은 물살.
둔탁한 소리.
그리고 고기가 얼음 위로 올라왔다.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강둑에서는 어죽이 끓고 있었다.
가마솥에서 김이 올랐다.
누군가는 수제비를 떼어 넣고 있었다.
손이 분주했다.

나는 그만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발밑이 꺼졌고,
차가움이 몸을 덮쳤다.

사람들이 끌어올렸다.
모닥불 옆에 앉혔다.
옷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몸에서는 김이 났다.

나는 떨었지만,
곧 멈췄다.

어죽이 내 앞에 놓였다.
뜨겁고, 짭짤했다.
속으로 내려가며 몸을 다시 살렸다.

Gemini_Generated_Image_d5z2kdd5z2kdd5z2.png

숯구덩이에서 감자를 꺼냈다.
검게 탄 껍질을 벗기면,
하얀 김이 났다.

그 맛은 지금도 기억난다.
왜 맛있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추위 때문이었고,
배고픔 때문이었고,
그때 거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얼굴이 토인처럼 갈라져도 상관없었다.

지금도 겨울이 오면,
나는 그 얼음 위에 서 있다.

발밑은 맑고,
아래로는 물고기가 헤엄친다.

나는 아직,
그 위에 서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돌계단 끝에서, 서 있는 것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