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도 의심받는 시대: 그래도 나는 카메라를 든다
요즘 나는 음식 사진을 보면서도
배가 고프지 않다.
배달 앱에 뜬 음식은 언제나 완벽하다.
윤기가 흐르고,
소스는 흘러내리지 않고,
그릇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깨끗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사진을 오래 보고 있으면
먹고 싶다는 감정 대신
먼저 피곤해진다.
이건 음식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음식 같다.
먹을 수 없는 음식.
살아 있지 않은 음식.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지금
죽은 음식을 주문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젠가부터 나는
사진을 보면 자동으로 묻게 된다.
“이거 진짜야?”
“아니면 AI야?”
이 질문이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다는 게
조금 무섭다.
예전에는
사진이 증거였다.
거기 있었다.
그 사람이 있었다.
그 빛이 있었다.
사진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사진은
먼저 의심받는다.
진짜 같은 가짜가 너무 많아졌고,
가짜 같은 진짜도 늘어났다.
그래서 뇌는
판단을 포기한다.
구분하려다 지친다.
따지다가 포기한다.
그냥 넘긴다.
화면은 가득 차 있는데
감각은 비어 있다.
나는 가끔
스크롤을 내리다가 멈춘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지?”
이 풍경은 자연스럽게 생긴 게 아니다.
많이 올릴수록 유리한 구조.
빠를수록 좋은 구조.
싸게 만들수록 이득인 구조.
플랫폼이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AI는 이 구조에 완벽하게 맞는다.
사람은 맞지 않는다.
사람은
직접 가야 하고,
기다려야 하고,
실패해야 하고,
대부분은 버려야 한다.
AI는
생성 버튼 하나면 끝이다.
그래서 가짜는 쌓이고,
진짜는 밀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플랫폼은 말한다.
“통제하겠다.”
AI를 막기 위해 AI를 쓰고,
AI를 걸러내기 위해 AI가 판단한다.
이 장면이 나는 좀 우습다.
불을 낸 사람이
휘발유를 들고 나타난 느낌이다.
더 우스운 건
그 과정에서
사람도 같이 맞는다는 것이다.
직접 찍은 영상도,
직접 말한 목소리도,
직접 만든 편집도,
“AI 아니란 증거를 내라”고 한다.
진짜가
진짜임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
이건 기술 문제가 아니라
신뢰가 무너진 사회의 풍경이다.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요즘은
“잘 찍는다”는 말보다
“직접 찍었다”는 말이 더 중요해진 것 같다.
조금 흔들려도,
조금 어두워도,
조금 삐뚤어도 괜찮다.
그 순간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
그게 전부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앞으로 카메라는
예쁜 이미지를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기계가 되는 건 아닐까.
이 장소에 내가 있었다.
이 시간에 내가 있었다.
이 빛을 내 눈으로 봤다.
그걸 남기는 기계.
아이러니하게도
가짜가 많아질수록
못생긴 사진의 가치는 올라간다.
완벽하지 않은 구도.
실수한 초점.
노이즈.
예전 같으면 버렸을 사진들이
이제는 오히려 살아 있다.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플랫폼은 통제를 선택했다.
하지만
통제로 신뢰를 만들 수는 없다.
신뢰는
증거로만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증거는
대부분 눅눅하다.
깔끔하지 않다.
예쁘지 않다.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살아 있다.
나는 가끔
배달 앱의 매끈한 사진을 끄고
직접 냄비를 연다.
김이 올라온다.
냄새가 퍼진다.
완벽하지 않지만
살아 있는 느낌이 난다.
나는 그쪽이 좋다.
아마 우리는 나중에
지금 이 시기를 이렇게 부를지도 모른다.
가짜가 너무 많아져서
진짜가 귀해진 시대.
그때가 오면
잘 찍는 사람은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 찍던 사람은 남는다.
나는 그쪽에 서 있고 싶다.
시스템이 뭐라 하든,
조용히 카메라를 끄지 않은 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