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대
말 많은 설명 필요 없이, 뽀대 죽인다
나는 오래전부터
빈티지 기어는 희귀해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희귀함은 가격을 만들지만,
가치는 만들지 않는다.
가치를 만드는 건
그 물건이 지나온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 묻어 있는
사용자의 손자국, 망설임, 실패, 우연 같은 것들이다.
Canon 50mm f/0.95.
사람들은 이 렌즈를
드림 렌즈라고 부른다.
나는 그 이름보다
이 렌즈가 어디를 지나왔는지가 더 궁금하다.
어떤 사람의 가방 안에 들어 있었는지,
어떤 방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는지,
어떤 밤에 꺼내졌는지.
이 렌즈는 분명히
사진만 찍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도 같이 찍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이런 렌즈는 수집용이지.”
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수집용이라는 말 속에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렌즈는
사용되지 않을 때 가장 빠르게 죽는다.
먼지가 쌓이고,
윤활이 굳고,
의미가 굳는다.
렌즈는
쓰라고 존재한다.
이 렌즈는 원래
캐논 레인지파인더용 렌즈였다.
Canon 7을 위해 만들어졌고,
당시 기준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밝은 상용 렌즈 중 하나였다.
조리개 f/0.95.
숫자만 보면 잘 와닿지 않지만,
이건 렌즈가 아니라 거의 구멍에 가깝다.
빛을 모은다기보다
삼킨다고 느껴질 정도의 밝기다.
렌즈 안에는
7장의 유리가 들어 있고,
그 유리들은 완벽함을 목표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당시 기술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향해
밀어붙인 결과물이다.
그래서 이 렌즈는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이 좋다.
이 렌즈는 한때
캐논 마운트였다.
그리고 지금은
라이카 M 마운트로 변환되어 있다.
이건 단순한 개조가 아니다.
이건 선언이다.
“나는 아직 현역이다.”
어댑터 하나 끼운 게 아니라,
마운트를 갈아내고,
정렬하고,
손을 본 흔적이 있다.
누군가는
이 렌즈를 살려서 쓰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 선택이 좋다.
편의가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렌즈는 완벽하지 않다.
개방에서는 부드럽고,
해상력은 요즘 렌즈보다 떨어지고,
대비도 낮고,
플레어는 마음대로 튄다.
최단 촬영 거리는 약 1미터.
가까이 다가가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든 단점이
오히려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
요즘 렌즈들은 너무 정확하다.
너무 똑똑하다.
그래서 조금 재미가 없다.
이 렌즈의 보케는
정돈되지 않는다.
배경이 깔끔하게 지워지기보다,
수채화 물감처럼 번지며 흐른다.
개방에서 생기는 은은한 글로우는
피사체 주변에
얇은 꿈막을 하나 씌운다.
선명하다기보다
몽환적이다.
정확하다기보다
기억 같다.
요즘은 이미지가 넘쳐난다.
AI가 만들어낸 얼굴,
AI가 만든 음식,
AI가 만든 여행지.
완벽한데,
살아 있지 않다.
나는 가끔
이미지를 보다가 멈춘다.
“이거 진짜야?”
이 질문이 자동으로 나오는 세상은
정상적인 세상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렌즈가 좋다.
이 렌즈는
절대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대신
내가 개입할 공간을 남긴다.
초점을 내가 맞춰야 하고,
노출을 내가 고민해야 하고,
실패를 내가 감당해야 한다.
귀찮다.
그래서 좋다.
카메라에 이 렌즈를 끼우면
이상하게 자세가 달라진다.
천천히 보게 된다.
조금 더 기다리게 된다.
조금 더 생각하게 된다.
요즘 세상과 정반대 방향이다.
사람들이 말한다.
“뽀대 죽인다.”
나는 이 표현이 좋다.
조금 비속어지만,
가끔은 이런 말이 가장 정확하다.
이 렌즈의 매력은
스펙으로 설명하면 망한다.
역사로 설명해도 부족하다.
그냥 들고 있으면
알게 된다.
말 많은 설명 필요 없이,
뽀대 죽인다.
하지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뽀대가 아니라
태도다.
이 렌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서두르지 마.”
“대충 찍지 마.”
“네가 책임져.”
요즘 세상에서
이렇게 말해주는 물건은 드물다.
나는 빈티지 기어가
과거의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을 통과해
현재에 도착한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물건을
지금 내가 쓰고 있다면,
그건 과거도 아니고,
전시품도 아니고,
골동품도 아니다.
현역이다.
앞으로도
나는 최신 기종보다
이런 물건에 더 손이 갈 것 같다.
완벽한 도구보다
말을 거는 도구가 좋다.
정답을 주는 장비보다
질문을 던지는 장비가 좋다.
Canon 50mm f0.95.
이건 렌즈다.
동시에
시간이 묻은 물건이고,
태도가 담긴 도구이며,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진을 찍고 싶은지
조용히 말해주는 물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말 많은 설명 필요 없이,
뽀대 죽인다.
하지만 그 뽀대는
겉모습이 아니라,
시간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