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도시 아래 묻힌 진실
반짝이는 도시 아래 묻힌 진실
서울, 을지로. 켜켜이 쌓인 시간의 먼지와 세월의 냄새가 배어 있는 낡은 극장. 빈 객석 한가운데, 한 남자가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스크린 위, 영화 <관상>의 마지막 장면이 잔잔히 흘러간다.
조선 건국의 격랑 속에서 정도전의 피살을 주도하고 왕권을 강화하던 **이방원(훗날 태종)**이 창밖을 응시하며 읊조린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 그 낮고 권위 있는 목소리가 극장을 가득 채우는 순간, 남자의 가슴 깊숙이 있던 무언가가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마치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온 성벽 한 귀퉁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지듯. 그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솟아올랐다.
'상(相)?' 남자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스쳤다.
'그건 권력이 새긴 각인일 뿐. 피로 씻어내고 피로 다시 그린 그림자.'
갑자기, 알 수 없는 현기증이 격렬하게 밀려왔다.
눈을 다시 뜨니, 그는 을지로의 초고층 빌딩 숲 위, 차가운 바람이 휘도는 허공에 떠 있었다.
발아래 서울은 거대한 생명체처럼 숨 쉬고 있었다.
한양 도성을 품고 흐르는 한강은 검은 띠처럼 도시를 가르고, 밤하늘 아래 불빛들은 마치 흩뿌려진 별들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그 화려한 아름다움 속에는 다른 것이 느껴졌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혼돈, 역성 혁명의 비정함, 정몽주와 같은 고려 충신들의 피,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새 왕조의 기억. 도시 전체가 살아 숨 쉬는 거대한 기록보관소 같았다.
그가 도시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 그 너머에서 진짜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선죽교(善竹橋). 개성 시내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핏빛 같은 달빛이 시냇물에 떨어져 번졌다.
1392년, 그 운명의 밤. 정몽주는 개경 수창궁에서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미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따르는 발소리에 정몽주의 가슴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이방원… 결국인가.' 그 순간, 굉음과 함께 그림자가 덮쳤다.
조영규가 휘두른 철퇴가 공기를 가르며 내리꽂혔다.
하지만 그 충격은 정몽주가 아닌, 그의 곁을 걷던 젊은 문인 변중량을 강타했다.
'퍽!' 끔찍한 소리와 함께 변중량의 머리가 으스러졌다.
피와 뇌수가 공중에 흩뿌려졌다. (역사적으로는 정몽주가 직접 피살되나, 이야기의 서사를 위해 변중량을 대역으로 설정함)
"으악!" 정몽주가 비명을 참으며 뒤로 넘어졌다.
얼굴은 온통 따뜻한 핏물로 뒤덮였다.
죽은 변중량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다.
기마병이 낙마하여 잠시 기절하는 사이, 정몽주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는 풀려 휘청였지만, 살아남으라는 강렬한 본능이 그를 채찍질했다.
그는 어둠 속으로, 개성 외곽의 깊은 산속으로 필사적으로 사라졌다.
역사책에는 그날, '정몽주, 선죽교에서 피살되다' 라 기록되었다.
한 인간의 생명과, 그가 지키려 했던 고려의 마지막 진실이 함께 사라진 순간이었다.
개경의 궁궐, 수창궁. 이성계는 높은 단상 위에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1392년 7월 18일, 마침내 그가 왕위에 올랐다.
"고려의 폐습을 씻고, 백성의 마음을 얻어 새 왕조를 연다!"
군신들의 함성은 뜨거웠지만, 무대 뒤에서 이방원의 눈은 차가웠다.
'민심? 정의? 허울일 뿐.' 그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왕조를 전복시킨 쿠데타의 핵심이었다.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반대 세력의 구심점을 없앴고, 위화도 회군으로 시작된 혁명의 완성을 위해 피의 숙청을 주도했다.
그가 필요로 한 건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과 '신화'였다.
그리고 그의 방식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는 완벽한 '악의 상징'이자 '역적'으로 둔갑되었다.
고려에 대한 '충신'이라는 그의 명예는 철저히 지워졌다.
한양 천도. 1394년, 조선의 새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천도했다.
이방원은 새 도시의 설계도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새로운 중심, 더욱 강력한 권력.' 한양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이며, 도읍지로서의 이점이 많다는 명분 뒤에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 남아 있는 옛 세력과 문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권력의 축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계산이 숨어 있었다.
한양은 이방원이 쌓는 새 권력의 첫 번째 돌이었다. 그 돌 하나하나 아래, 수많은 진실과 이름 없는 영혼들이 깔려 있었다.
깊은 산중 암자. 죽음을 피한 정몽주는 손이 떨리는 채로 붓을 들었다.
먹의 검은 선이 마르지 않은 종이 위로 흘러내렸다.
『이방원은 역적이다. 주군을 배신하고, 피로써 정권을 찬탈했다. 그 밤 선죽교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어간 자의 피가 역사의 진실을 덮었으니…』 피로 얼룩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젊은 문인이 자신을 대신해 죽는 모습, 철퇴가 머리를 부수는 끔찍한 소리, 뇌수와 피가 뒤섞인 역겨운 냄새. 그는 온몸으로 울부짖고 싶었다.
대신 붓 끝에 모든 분노와 절망을 쏟아부었다.
고려의 마지막 숨결, 그리고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진실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그 두루마리는 그의 유일한 혈육, 아들 정윤에게 은밀히 전해졌다.
"이것이… 우리 집안의 피다."
정윤은 두루마리의 무게에 숨이 막힐 듯했다.
선친의 원한과 묻힌 진실의 무게. 하지만 운명은 잔혹하게도 그를 이방원의 막내딸, **이연(李姸)**에게 이끌었다. (역사적으로 이방원에게 '이연'이라는 이름의 막내딸은 확인되지 않으나, 서사를 위한 허구적 설정하지만 고증에는 3명의 자녀가있다고한다) 그녀의 눈빛은 순수했고, 미소는 해맑았다. 정윤은 갈등에 찢겨났다.
'아버지의 원수…
그의 핏줄을 사랑하다니. 이건 배신이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놓을 수 없다.'
결심은 고통스러웠다. 아버지의 복수를 포기할 수 없었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없었다.
어느 찬 비 내리는 밤, 정윤은 두루마리를 납으로 만든 견고한 통에 넣어 봉인했다.
개성 인근, 이름 없는 외딴 절의 오래된 석탑 아래, 그는 땅을 깊이 파고 두루마리를 묻었다.
땅속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두루마리를 바라보며, 그는 아버지의 사무친 원한과 자신의 애끓는 사랑을 함께 묻는 기분이 들었다.
'미안합니다, 아버지. 이게 제 선택입니다.'
그 후, 정윤의 모습도 역사의 안개 속으로 쓸쓸히 사라졌다.
2013년, 북한 개성 인근. 땅이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흔들렸다. (2013년 이시기 지진이 기상청 관측되었다)
'우르릉…' 지진이 지나간 자리, 한 고택의 마당 한가운데 바닥이 크게 갈라지며 깊은 틈새를 드러냈다.
틈새 아래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납제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 당국은 상자 안의 낡은 문서를 해독할 수 없었다.
조선 초기의 한자와 고어로 빼곡히 적힌 두루마리. 결국 남한의 최고 암호학자이자 역사학자, 정현석(鄭賢錫) 박사에게 남북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
북한에서 파견된 학자는 뛰어난 고문헌 전문가인 **이지연(李知姸)**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 남북 학자로서의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도 두 사람은 희귀한 고문헌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호기심을 감출 수 없었다.
문서의 복잡한 암호와 난해한 문체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과정. 밤낮없이 이어진 협업은 서서히, 서로에 대한 어색한 신뢰로 변해갔다.
어느 날, 지연이 한 구절을 해독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여기… '정윤(鄭胤)'이라는 이름이 나오네요. 그리고…"
현석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문서에는 또 다른 익숙한 이름이 등장했다.
'이방원(李芳遠)'.
"이 박사님, 이건…" 현석의 목소리가 메었다.
갑작스러운, 그러나 너무나 강렬한 직감이 그를 내리쳤다.
그는 자신의 가문 족보를 떠올렸다.
먼 조상으로 전해지는, 기록이 모호했던 **'정윤'**이라는 이름. 그리고 바로 옆에 앉은 이지연. 그녀의 성(姓)은 '李'. 그 순간, 공기 중에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서로의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의 얼굴에 경악과 함께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빛이 교차했다.
그들은 단순한 연구자가 아니었다. 600년 전 비극적인 운명으로 얽혔던 두 가문, 피로 이어진 원한의 역사 그 자체의 후예였던 것이다.
두루마리의 마지막 장이 조심스럽게 풀렸다.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정몽주의 자필로 보이는 편지였다.
『이 나라는 강함으로 세워졌으되, 그 기초는 진실 위에 있지 않다.
내가 본 왕은 민심을 품은 자가 아니라, 차가운 쇳덩이 같은 검을 품은 자였다. 한양(서울)은 그 검의 새로운 칼집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도시의 땅은 고려인의 피로 젖어 있고, 그 기억은 승자의 웃음소리 아래 묻혀 있다.
후손이여, 이 기록이 빛을 보는 날이 온다면… 부디, 진실을 마주하라.』
현석은 편지를 읽는 동안 숨이 막힐 듯했다.
선조의 사무친 절규가 600년의 시간을 뚫고 그에게 고스란히 다가왔다.
지연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피 속에도 흐르는, 역사의 '승자'이자 '가해자'의 피. 그 역사의 무게가 그녀를 짓누르는 듯했다.
서울. 여의도 63빌딩 옥상. 현석과 지연이 난간에 기대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현석의 손에는 정몽주의 두루마리 복제본이 들려 있었다.
갑자기, 현석의 시야가 흐려졌다.
아니, 주변의 공간 자체가 마치 물결처럼 일그러지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 순간, 옥상에 세 사람의 실루엣이 마치 홀로그램처럼 겹쳐 보였다.
첫 번째 실루엣: 갑주(甲胄)를 걸친 채 냉철한 눈빛으로 서울(한양)을 응시하는 이방원. 그의 눈에는 도시가 하나의 거대한 전리품처럼, 자신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기념비처럼 비쳤다.
두 번째 실루엣: 피로 얼룩진 옷차림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이방원을 사무치게 노려보는 정윤. 그의 손에는 봉인된 두루마리가 마치 유일한 희망인 양 꽉 쥐어져 있었다.
세 번째 실루엣: 현대 복장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정현석. 그의 가슴에는 600년 전 선조의 분노와, 피로 얽힌 역사의 복잡함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과연 서울은 누구의 도시였는가.' 현석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질문이 차가운 공중에 맴돌았다.
세 개의 시선이 과거와 현재를 가로질러 교차했다.
승자와 패자, 기록자와 은폐자, 복수자와 사랑하는 자. 실루엣은 흐릿해지고, 시간의 경계는 무너졌다. 과거와 현재의 층위가 한데 겹쳐진, 기묘하고도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밤이 깊었다. 서울은 온통 반짝이는 불빛의 바다였다.
찬란한 네온사인과 고층빌딩의 조명이 도시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마치 모든 상처와 어둠을 덮어버리는 거대한 빛의 장막처럼.
현석은 옥상 난간에 기대어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들린 두루마리 복제본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정몽주의 피 맺힌 절규, 정윤의 고통스러운 선택, 그리고 600년을 뚫고 현대에 드러난 진실의 무게. 하지만 그 모든 것도 이 화려하고 무심한 도시의 빛 앞에서는 무색해 보였다.
'이 눈부신 빛 아래, 과연 누가 그 옛날의 피와 눈물을 기억하겠는가.'
진실은 다시금, 승자가 쌓아올린 현대의 화려한 탑 아래로 깊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서울은 누구의 도시인가?"
현석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바람에 실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승자의 영광을 노래하는 도시인가, 아니면 패배하고 침묵해야 했던 자들의 이름 없는 거대한 무덤인가?"
그는 천천히 두루마리 복제본을 가방 속에 넣었다.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숨 막힐 듯 아름답고 동시에 너무나 무심한 서울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그 광활한 빛의 바다 위로, 세 겹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졌다.
과거의 피, 현재의 질문, 그리고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미래의 무게. 그 그림자는 빛을 완전히 가리지 못했지만, 도시의 기억 깊숙이 영원히 각인될 것만 같았다.
그가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을 때, 그의 뒷모습 위로 세 겹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따라다녔다.
⟪끝⟫
작가의 말
주요 고증 사항 반영 및 보강:
1392년 선죽교 사건: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려 했고, 조영규를 시켜 철퇴로 살해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서술했습니다. 다만, 원본 줄거리에 충실하기 위해 정몽주 대신 '변중량'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죽는 것으로 유지했습니다. (실제 변중량은 정몽주의 서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성계의 즉위 및 한양 천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고 한양으로 천도한 시기(1394년)와 그 명분,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의도를 명확히 했습니다.
이방원의 역할: 정몽주 제거와 왕권 강화에 이방원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했습니다.
용어 사용: '한양 도성', '수창궁', '갑주' 등 당시를 연상시키는 용어를 적절히 사용했습니다.
정몽주의 편지: 그의 시조 "단심가"의 정신을 반영하여 왕권 교체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세 인물의 상징성: 이방원(권력과 승자), 정윤(피해자와 진실), 정현석(현대를 살아가는 후손이자 진실을 마주하는 자)의 시선과 그들의 상징적 의미를 더 명확히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정종실록, 태종실록
정몽주 피살 사건, 이성계의 왕위 즉위 과정, 한양 천도 기록 등
국사편찬위원회 디지털 아카이브:
http://sillok.history.go.kr
《고려사》 – 열전 / 본기 / 세가 편 정몽주의 정치적 역할과 고려 말의 혼란상, 변중량 관련 기술
《동국통감》 – 조선 초기 유학자 서거정 편찬 정몽주와 이방원의 관계, 충절 서사 및 고려 말 정치기반 설명
《매월당집》 – 김시습 문집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시문, 당시 지식인의 시대인식 참고
『한양 천도에 대한 고찰』 – 국사편찬위원회 학술자료집 1394년 한양 천도의 정치·지리적 배경 정리 논문집
『정몽주 연구』 – 김갑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3 정몽주의 생애, 사상, 단심가 해석 등 전문 연구서
『이방원의 권력기반 연구』 – 한국사학회 논문, 2007 이방원의 초기 정치 활동과 정적 제거 전략 분석
『개성의 역사와 유적』 – 개성시문화연구소, 북한 발간 자료 인용 개성 지진 및 유물 고증 관련 간접 참조 자료
영화 「관상」 (2013, 한재림 감독) 서사적 발상 및 메타포 시작점. 픽션과 실제 역사 간의 매개체로 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