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 그 깊은 물

612년 여름, 장맛비

by 마루

살수, 그 깊은 물

612년 여름, 장맛비가 스산하게 그친 고구려 땅. 수나라 30만 대군이 퇴각하는 발자국 소리가 진흙탕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을지문덕은 막사에서 지도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퇴각이 아니다... 병력을 재정비하려는 숨결이다."* 지도 위 핏자국 같은 붉은 점이 열목천(熱目川)을 훑었다.


"장군님! 열목천 북쪽 계곡에 깊은 소(沼)가 숨어 있습니다.

" 전령이 허리에 찬 노루 가죽 뭉치를 풀었다.

"어제 이 녀석이 발을 헛디뎌 빠져 죽었지요.

겉은 얕아 보이지만 밑바닥은 수렁입니다."

을지문덕의 눈동자가 좁혀졌다.

"우유 한 말을 가져와라."

병사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그는 강물에 우유를 흘려보냈다.

잔잔한 표면은 순간 하얗게 일렁였으나, 십 걸음도 채 못 가 소용돌이에 삼켜졌다.

"여기다." 그의 목소리에는 칼날 같은 결의가 서렸다.

"이 물이 적을 삼킬 것이다."


열흘 뒤, 새벽 안개가 강을 감쌌다.

고구려 병사들은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

발밑엔 젖은 이끼를 깔아 발소리를 죽였고, 투창의 쇠날에는 진흙을 발라 햇빛을 차단했다. 을지문덕이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니, 수나라 선봉대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발에 딱지 앉은 상처, 이질로 움츠러든 장졸들, 피고름이 스민 말의 갈기.

"얕다! 어서 건너라!

" 수나라 장수의 고함이 안개를 가르자 대열이 흐트러졌다.

첫 번째 병사가 강 한가운데 닿는 순간

쿠웅!

갑옷 무게에 발밑 땅이 꺼졌다.

"구원──!" 비명이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뒤따르던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밀려들었고, 말과 수레가 뒤엉켜 수렁을 휘저었다.

그때였다.


"화살!" 을지문덕의 함성이 천지를 찢었다.

매복한 고구려 군사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화살은 비처럼 쏟아졌고, 투창은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적들을 찔렀다.

드득, 푸드득!

창에 꿰인 몸뚱아리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소리가 마치 지옥의 장단이었다.

불화살이 수레에 박히자 기름 냄새와 탄 살내가 뒤섞였다.

"물이... 물이 움직인다!

" 어떤 수나라 병사가 비명을 질렀다.

진흙탕에 빠진 말이 발버둥치며 주인을 발굽으로 짓밟고, 동료를 잡고 매달린 병사는 함께 수장되었다.




을지문덕이 언덕에 서 있었다.

강물은 짙은 적갈색으로 변해가고, 표류하는 시체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떠다녔다.

피와 진흩이 섞인 냄새가 그의 혀끝에 달라붙었다. *'이 승리는 쓴맛이구나.'*

부장이 다가왔다.

"장군님, 전사자만 15만 이상입니다.

이제 강 이름을──"

"살수(薩水)라 하라."

그의 목소리는 피로 인한 갈라짐이 있었다.

"산(薩) 자를 쓴다. 이 강이 영원히 전쟁을 산처럼 막아주길 바라서다."

머리 위로 까마귀 떼가 날아다녔다.

검은 날개가 피로 물든 강을 가리자, 살아남은 수나라 병사 하나가 강둑에 쓰러져 울부짖었다.

"물귀신이다...

이 강은 살아있다──!"

을지문덕은 등을 돌렸다.

발밑에서 새싹 한 포기가 피로 젖은 땅을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작가의 글

614년 수양제가 재침공했으나 살수에서의 공포가 군중에 퍼져 "저 강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에 병사들이 진군을 거부했다. 고구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했다. 역사는 을지문덕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증명했다. **"전쟁은 강물처럼, 반드시 되돌아온다."



[고증 메모]

실제 역사 속 살수대첩은 612년 수양제의 침공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로, 수나라군의 퇴각 시 고구려가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으로 추정되며, 지형의 복잡함과 병사들의 탈진, 식량난이 결합되어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나라의 침공은 총 세 차례 있었고, 을지문덕은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방어를 이끌었다.


'살수'라는 이름 자체가 전투 이후 붙여졌다는 설도 있으며, 고대 전투에서 '지형'의 지배력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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