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송화의 여름

원주 중앙시장의 오래된 담벼락.

by 마루

채송화의 여름


원주 중앙시장의 오래된 담벼락.

오늘 그 벽에 핀 채송화를 보았다. 핑크빛과 흰빛이 섞인 작은 꽃잎들이,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며 햇빛을 흘렸다. 햇빛은 꽃잎 사이를 스칠 때마다 물에 잠긴 유리조각처럼 번쩍였고, 그 순간 코끝엔 흙과 햇살이 섞인 여름 냄새가 났다.


그 꽃을 보는 순간, 오래된 여름의 기억이 천천히 깨어났다.


채송화가 한창 피던 여름날, 누나는 꽃잎을 으깨 백반과 섞더니 작은 사발을 들고 나를 불렀다.

“손 좀 내밀어봐.”


그때 손끝에 닿았던 감촉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꽃잎이 으깨져 만든 연한 풀색 물이 내 손가락을 타고 흘렀고, 차갑고 미끄러운 느낌이 손끝에 스며들었다.

누나는 내 새끼손가락을 잡고, 명주실로 채송화를 돌돌 말았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창피해. 이런 거 하면 남들이 욕한단 말이야.”


누나는 웃으며, 손끝에 묻은 채송화 물을 털지도 않은 채 내 눈앞에 자기 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는 괜찮아. 이쁘잖아. 나 봐봐.”


그녀의 열 손가락은 모두 채송화 덩어리로 부풀어 있었고, 명주실 사이로 맑은 파란빛 물방울이 맺혀 반짝였다. 그 물방울이 햇빛에 부딪혀 작은 무지개빛을 띠었고,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누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봐, 이쁘지? 꽃이랑 나랑 친구가 된 것 같아.”


다음날, 물이 덜 빠진 손으로 학교에 갔다.

손가락 끝에서 아직 풀잎과 백반이 섞인 풋내가 은은하게 났고, 걸을 때마다 손끝에서 바람이 스치는 기분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여자애들이 힐끗 나를 보고 푸식 웃었다.

옆에 있던 남자애가 말했다.

“야, 남자가 무슨 새끼손가락에 물 들이고 난리냐?”


나는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내 옆에 앉은 짝꿍 영희가 내 손을 빤히 보더니, 조심스럽게 내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와, 이쁘다.”


그 순간 영희의 손끝이 내 손가락을 스쳤다.

누나가 손을 잡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영희의 손끝은 살짝 따뜻했고, 얇은 손톱이 내 손끝을 간질였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고, 풀향이 아닌, 영희 손에서 나는 비누 향이 문득 코끝을 스쳤다.


영희가 내 새끼손가락을 오래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도 이거 하고 싶다… 그 누나한테 부탁 좀 해줄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때, 우리는 먼지 날리는 신장로를 걸었다.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잎사귀에서 비린 듯한 여름 강물 냄새가 났고, 흙길은 햇빛을 받아 미세하게 반짝였다. 신발 밑창에 묻은 먼지가 발걸음을 따라 연한 흙냄새를 뿜었다.


영희는 가방을 한쪽으로 메고 내 옆을 걸었다.

그리고 살짝 내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나는 마지못한 척하면서,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순간 손끝에서 느껴지는 영희의 미세한 체온과, 걸음을 맞추는 발소리의 리듬이 내 귀에 자꾸만 맴돌았다.

신장로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한 먼지 냄새를 품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내게는 꽃향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신장로를 한없이 걸어 올라갔다.

작가의 말


누나는 내 여름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영희는, 그 여름 속에서 갑자기 불어온 작은 바람 같았다.

이제는 중앙시장의 담벼락에 핀 채송화를 보며 그 여름을 떠올린다.

꽃잎 위에 맺힌 작은 물방울처럼, 그 시절의 기억이 내 마음속에서도 아직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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