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피우는 손
벚꽃이 피고 졌는데, 온전히 봄이 오지 않았다. 수인은 사과꽃이 필 무렵이 되어야 비로소 경량 패딩을 정리했다. 벚꽃이 떨어진 자리에 자글자글 초록 버찌가 돋아나는 연두의 계절에 사과꽃이 피면 별일 없이도 수인의 마음에 달이 차올랐다. 벚꽃이 다 졌는데도 마을 어귀의 사과밭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수인은 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 꽃이 폈다 저버릴까 봐 출퇴근길에 보는 사과밭을 유심히 살폈지만 사월이 다 지나가도록 사과꽃은 피지 않았다. 사과는 열매도 열매지만 꽃이 유난히 싱그러워 꼭 농가의 주인이 아니더라도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과 농원에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말 느지막하게 일어난 수인이 남편과 함께 발발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있을 때 사과꽃이 소복하게 피어난 과수원을 보게 되었다.
“여보, 여기는 사과꽃이 폈네. 동네 입구에 있는 사과밭에 꽃이 없길래 아직 시기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거긴 작년에 냉해에다 병충해까지 입는 바람에 올해도 꽃을 피우기 어려운 모양이야. 사과꽃이 피고 서리가 내렸잖아. 사월에 냉해를 입으면 작물이 무엇이든 피해가 있기 마련이지만 사과 농가는 유독 피해가 크지.”
“한 해 농사 망친 것도 가슴 아픈데,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닌가 보구나.”
“병충해를 한 번 입으면 땅이 안 좋아져서 회복하는데도 몇 년이 걸린다고 하더라.”
“정말 안타깝다. 농사짓는 일이 인력만으로는 정말 안 되는 거구나. 얼마나 속상할까. 일 년 내내 일하고 한해 연봉을 못 받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러니까. '농사나 짓지 뭐.' 이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꼭 하늘의 탓이 아니더라도 우린 텃밭 가꾸는 것도 잘 못 하잖아. 농사 쪽으로는 영 재능이 없는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씨앗 뿌리면 저절로 자라는 줄 알았는데, 정성을 안 들이면 제대로 되는 게 없어. 그런데 이 사과밭은 몇 해 전 혼자되신 선애 아주머니의 과수원인데, 혼자서도 잘 키우셨네.”
“선애 아주머니 밭이구나!”
몇 해를 지내는 동안 선애 아주머니의 과수원이 여기라는 걸 수인은 알지 못했다. 선애 아주머니는 텃밭에서 수확물이 있는 날엔 직접 기른 방울 토마토와 애호박, 감자 같은 채소를 수인의 집 현관에 가져다놓곤 했다.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열면 새벽부터 누가 놓고 갔는지 알 수 없는 과일과 채소 같은 것들이 놓여 있을 때가 있었다. 이름표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누가 놓고 간 건지 한참을 모르고 있다가 또다시 배추며 파 같은 채소들을 들고 들어오다 마주치는 바람에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럴 때면 수인은 시골의 순박한 정으로 삶이 풍성해지는 기분이었다. 마당에서 기르는 발발이 방울이가 사람들의 발소리를 귀신 같이 듣고선 사납게 짖어대는 바람에 뒤뜰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하물며 마당 안으로 들어와 뭔가를 놓고 가려면 들어왔다 나가는 내내 방울이가 앙칼지게 짖어댔을 것이다. 하지만 선애 아주머니가 드나들 땐 방울이 짓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 집 아저씨, 말벌에 쏘여서 돌아가셨잖아.”
“말벌에 쏘였었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하시길래 지병이 있으셨나보다 했네.”
“산소에서 벌초하시다가 그러신 모양이야.”
“정말 너무 허무하게 돌아가신 거네. 아저씨 처음에 우리가 귀촌했을 때 참 퉁명스러웠잖아. 담 밖으로 쓰레기 버리지 말라면서. 쓰레기 버린 적도 없는데 말이야. 난 그때 텃새부리는 어르신 정도로 생각했지.”
“이전에 살던 분하고 사이가 안 좋았겠지.”
“처음엔 되게 불편한 이웃이라고 생각했지. 시간이 좀 지나면서 참 인정스레 잘해주였는데….”
수인의 집 뒤뜰로 나가면 아저씨의 선산이 있다. 아저씨는 선산을 관리하기 위해 수인의 집 뒤편을 늘 오가는 사람이었다. 수인이 오기 전 주인이 담 밖으로 쓰레기를 버리고 태운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꽃밭을 가꾸기 위해 수인이 땅을 팠을 때 파헤쳐진 흙 속에서 타다만 플라스틱과 비닐 잔해들이 엄청나게 나왔었다. 땅을 팔 때마다 나오는 폐기물을 보면서 수인은 아저씨가 왜 그토록 경계하며 퉁명스럽게 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선애 아주머니네와 수인의 집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선산이 아니었다면 그 집 아저씨가 수인 집 뒤편으로 오고 가는 일이 드물었을 것이다. 수인의 집 북쪽으로 나지막하게 솟아있는 언덕 위에 마련된 선산 덕분에 이웃이 된 것이나 마찮가지다. 수인과 산이 담벼락 밖에 묻혀 있는 쓰레기를 모두 수거하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땅을 일궈 꽃밭을 만들면서 아저씨의 태도가 달라졌다. 아저씨는 매년 가을 선산에 벌초할 때가 되면 수인의 집 담을 따라 무성하게 자라난 풀을 모두 베어 주곤 했다.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에 산이 나가보면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아저씨가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가 선산에 묻히면서 이제는 선애 아주머니가 선산을 돌보기 위해 수인의 집을 지나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아들이 잘 돼서 미국에 있다고 들었어.”
산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주머니 워낙 순박하시니까 그런 아들이 있는지도 몰랐네. 무슨 일을 하는데?”
“돈을 많이 벌었다는 얘긴 들었는데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그런데 통 시골에는 오지 않는 모양이더라.”
“시골에 그런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자식들이 잘살고 있어도 혼자 시골에 남아서 살고 계신분들 말이야. 좀 쓸쓸하다.”
산과 수인이 마을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어느새 점심 시간이 되었다.
“여보, 주말인데 우리 요 앞 식당에서 밥 먹자. 주말만이라도 밥솥에서 해방되고 싶어.”
“그러자.”
방울이를 마당에 묶어두고, 약 이백 미터 거리에 있는 마을 식당을 들어섰다. 주인은 없고 선애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계셨다.
“안녕하세요. 주인 아주머니 어디 가셨어요?”
“응, 아저씨랑 잠깐 나갔는데. 식사하시게?”
선애 아주머니가 순박하게 웃으며 물었다.
“네, 주인도 안 계신데, 다음에 와야겠네요.”
“뭐 드시게? 주문하셔. 내가 대신 차려줄게.”
“그래도 돼요?”
“주인장만큼은 아니어도 내가 차려줄 수는 있지.”
“그럼 산채비빔밥 두 개 부탁드려요.”
선애 아주머니는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뚝딱뚝딱 음식을 차려내 왔다.
“혹시 여기서 알바하시는 거예요?”
“아이고, 아녀. 늘 있는 곳이니께 그냥 하는 것이제.”
아주머니가 차려온 밥상은 늘 먹던 산채비빔밥과 다르지 않았다. 그냥 나갈 뻔한 사람을 붙잡아 챙겨주는 마음 씀씀이까지 느껴지는 훈훈한 밥상이었다.
“어떨랑가 모르것네. 내가 대충 보이는 것만 차려 왔는디,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하셔.”
아주머니는 챙겨주고도 신경이 쓰이는지 쉽게 돌아서지 못했다.
“아니에요. 이 정도면 훌륭한데요. 잘 먹겠습니다.”
산이 대답했다.
“아주머니가 식당에 자주 오시나 보다. 주인도 없는 부엌에서 음식을 저렇게 차려내시는 것 보면 말이야. 이 정도면 알바하셔도 되겠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온 수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참 생활력이 강하신 분이야. 마을에서 혼자 사과꽃을 피워냈잖아. 마을 사람들하고도 잘 지내시고.”
산이 말했다.
“그래, 아주머니는 마을 행사에도 빠짐없이 나오셔서 꼭 참여하시더라. 조용하게 마을의 일원으로 생활하시니 얼마나 다행이야. 혼자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하고 교류하면서 지내시니까 혼자서도 외롭지는 않고.”
월요일 아침, 수인은 출근길에 마을 아주머니들이 무리를 지어 식당 앞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선애 아주머니도 함께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이른 새벽부터 봄나물을 따온 모양이었다. 돗자리 위로 봄나물이 부려져 있었다. 나물 캐는 동네 아낙들이 올챙이처럼 모여 수런거리는 소리가 정겨웠다. 몇 해 전 선애 아주머니의 남편이 세상을 버렸어도, 해외에 거주는 아들 소식이 없어도 선애 아주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이전과 다름없이 살고 있다. 다시 여름이 되면 아주머니는 새벽부터 부산스럽게 텃밭의 작물을 거둬들일 것이다. 수인의 마당에 묶여있는 방울이가 더는 짓지 않을 만큼 자주 들나들던 걸음으로 수인의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문 앞에 방울토마토와 못난이 호박을 부려놓고 갈 것이다. 올해 봄은 선애 아주머니의 사과밭에서만 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아주머니를 닮은 사과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