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오늘날 공화 정치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해 부족했던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독재자의 폭정에 대한 인내심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유에 대한 열망과 RES.PVBLICA(레스 푸블리카, 공공의 것)에 대한 자부심은 다른 시대에 비해 월등했다.
로마 제국이 전쟁과 정복의 과정에서 저지른 엄청난 살상과 약탈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제국의 명성을 굳건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악행들을 덮을만한 위대함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내가 꼽을 수 있는 한 가지는 로마가 발명하고 완성시킨 '공화정 시스템'이다.
초기 기독교에 대한 잔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 문화권에서 로마 제국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로마의 수많은 건축물에서 떼어간 대리석으로 교회를 건설했지만, 지금까지 청구서 한 장 날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감사함 때문만도 아니다.
군주제 치하에서 교황이 왕 보다 더 높은 지위를 누렸던 암흑시대보다는 오늘날 공화제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훨씬 더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중세 천 년간 교회가 하지 못했던 인권 존중과 양심의 자유를 공화 체제 하의 법률이 어느 정도는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로마 왕정 시대의 이야기는 문헌자료가 아닌 후대의 역사가들이 전승을 모아 놓은 것들이다. 그렇다고 공화정의 토대가 되었던 성숙된 사회구조와 그 시대를 살았던 로마인들의 미덕이 약해질 수는 없다.
왕정 시대를 끝내고 공화정을 구축해 가는 과정과 그 이후에 나타난 여러 가지 결과들에서 보여준 로마인들의 존엄과 고결한 정신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몇 백 년간 축적된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로마는 왕정 시대에 이미 공화정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로마의 왕은 민회(평민)의 투표와 원로원의 승인에 의해 선출되었다. 세습이 가능했지만 혈통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었다. 왕의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해 원로원과 민회, 두 세력이 견제함으로써 삼권분립이라는 독특한 정치형태를 고안해냈다. 그리스 민주정을 모방하긴 했지만, 이제 막 건국한 신생 국가라는 것을 감안할 때 놀라울 정도로 파격적이고 모험적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에게 없었던 것은 군주의 폭정에 대한 인내심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시대, 다른 나라들의 피지배 계층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집정관과 황제의 자리를 위험한 직업으로 만들었다.
일곱 번째 왕 타르퀴니우스는 이러한 로마인들의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가 쫓겨나면서 약 240년간 이어진 왕정 체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개막되었다. 타르퀴니우스의 폭정도 문제였지만, 로마인들의 RES.PVBLICA(레스 푸블리카, 공공의 것)에 대한 강한 프라이드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로 전환한 사례가 지구상에 몇 나라나 될까? 로마 공화정이 폐지되고 약 1,800년이 지난 뒤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이 유일할 것이다. 나머지 국가들은 대부분 외세의 침입과 개입에 의해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체제를 전환했거나, 자체 몰락 혹은 지배계층 간 권력 나눠먹기 방식으로 수 천년 동안 이어진 굴종의 상태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 권력 투쟁과 국가 수호, 두 가지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 위대한 평민
초기 공화정 시대 평민들의 삶은 왕정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권력을 독점한 귀족들의 횡포와 착취에 시달렸고, 정치권력과 사회 주도 세력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평민들은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귀족들과 기나긴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하나씩 쟁취해갔다.
귀족 계급이 야금야금 던져주는 한두 가지 결과물에 도취되지 않았고, 치열한 권력 투쟁은 수 백 년간 여러 세대에 걸쳐 끈질기게 이어졌다.
오랜 기간 억눌려 있던 분노가 폭발하여 위정자들을 몰아낸후에 마치 목적을 다 달성한 것처럼 새로운 지배계급에 대한 긴장과 감시를 서둘러 풀어 버리는 다른 시대, 다른 국가들과는 크게 달랐다.
성산 사건을 통해 호민관 제도를 도입하고, 평민들이 정부 주요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잇달아 통과시켰다(12 표법, 호르텐시우스 법 등). 귀족과 평민 간 통혼이 가능하게 되었고, 평민들도 집정관 자리를 차지할 권리와 호민관 출신이 원로원에까지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주목할 점은 평민들은 계급 간 살벌한 권력 투쟁 속에서도 신분과 상관없이 역량을 갖춘 집정관 후보에게 소신껏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평민 출신 후보에게 몰표를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전쟁에서 패할 경우 잃게 될 치명적인 손실과 승리시 얻게 될 결실 간의 차이가 극과 극이라는 것도 능력 위주의 투표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로마의 귀족들 또한 위대한 시대적 대의에 소극적이지 않았다. 원로원과 집정관은 평민 계급을 권력과 힘으로 짓밟지 않았고, 놀라운 인내심으로 끊임없이 타협하고 조율하면서 공화정을 지키고 발전시키려고 애썼다. 귀족들은 비록 평민들과 권력을 비슷하게 나눠가지게 되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국익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외침과 전쟁을 통해 깨달았다.
외세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으면서까지 힘없는 백성들을 억압했던 매국노들과는 너무나 달랐고, 국민들의 고통과 국가의 존망은 외면한 체 사리사욕에 급급한 위정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 집정관은 로마에서 가장극한 직업이었다.
공화정 체제에서는 왕 대신에 일 년 임기(연임 가능)의 집정관 두 명에게 나라의 운영을 맡겼다. 아무리 뛰어난 리더라도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에는 일 년은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집정관 자리가 정치권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로마인들의 의지는 강력했다.
이 짧은 일 년 중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내야 했다. 전쟁 중에도 임기 종료가 임박하면 겨울철 휴전기간(전투 중이면 부사령관에게 위임)에 로마로 복귀하여 다음 집정관 선출을 위한 투표를 주관했다.
사망률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지만 여전히 많은 집정관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명예(개선식)와 부(전리품)를 동시에 얻었다.공화정 시대 총 천여 명에 달하는 집정관들 중 군대를 사유화하여 권력을 독점한 집정관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등이 대표적)
로마제국의 위대함 중에 공화정을 무너뜨린 카이사르도 포함되어 있다. 만약 카이사르가 다시 살아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공화제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면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카이사르의 반대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공화정 말기로 돌아가 보자. 공화정 수호자들이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정치 시스템을 개혁하고 제국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아무리 우겨도, 공화정의 한계와 문제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표면화되어 있었다. 내전의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었던 당시,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공화정을 사수하기 위해 폼페이우스 편에 설 것인가?
당시 로마의 많은 사람들이 이 둘 사이에서 고뇌하고 망설였다. 이웃과 친구사이, 심지어 부자지간에도 서로 다른 운명을 맞았다.
제정 체제는 평화롭고 풍족했지만, 공화정만큼 목숨을 걸고 지킬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았다. 로마 시민들의 열정은 이미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 때부터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