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다음으로 로마 역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을 꼽으라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적임자일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로 불리던 19살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격동의 정치 무대 한복판에 홀로 서게 되었다.카이사르의 후계자였지만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경험이 크게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자신의 역량을 검증받을만한 업적은 전무한 상태였다. 신인이라기보다는 수습생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자 막대한 부를 물려받은 상속자였다. 그에게는 내전 종식과 새로운 로마 제국 건설이라는 막중한 시대적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카이사르의 관용 덕분에 상당수의 정적들(공화파 잔당)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복잡하고 난해한, 그러면서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과업을 완성하지 못하면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명분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 시대(19세~35세, BC44~BC26) : 지략, 인내, 결단, 냉혹
허약한 체질과 장군으로서 빈약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두 차례의 큰 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로마 제국 초대 황제가 될 준비를 갖추었다.
필리피 전투에서 카이사르 암살을 주도했던 브루투스(카이사르의 가장 오래된 애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와 카시우스를 비롯한 공화파 세력들을 완전히 몰살했고, 악티움 해전에서는 카이사르의 심복이자 자신의 최대 라이벌인 안토니우스 일당을 제거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카이사리온을 살해하면서 "너무 많은 카이사르는 필요 없다"는 말을 남겼다.
카이사르 사후에 청년 옥타비아누스는 극도로 신중하면서도 천재적인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정적들과 싸울 때는 뛰어난 지략과 결단으로 상대를 압도했고, 선택의 순간에서는 한치의 망설임이나 흐트러짐도 없이 단호하게 결정하고 냉혹하게 실행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36세~76세, BC27~AD14) : 모호, 영리, 신중, 타협
역사의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야 순방향인지는 예측하기 힘든 시대였지만, 공화정으로 다시 돌아갈지 아니면 새로운 시대가 열릴지 로마와 속주 전체의 관심이 아우구스투스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개막된다면 후대의 계승자들은 초대 황제가 걸었던 길을 표본으로 삼을 터였다.
한 세대 동안 지속된 내전이 종료되고 아우구스투스의 정적들이 사라진 로마에 평화가 찾아왔다. 천하무적이 된 제국의 일인자에게 원로원은 내전 종식의 공로를 명분 삼아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부여했다. 실질적으로 그를 황제로 인정한 셈이었다.
황제는 제국의 전체 군단을 통솔할 권한을 가진 총사령관이자 신격화된 카이사르의 계승자였다. 이제 로마 제국 내에서 그의 말은 곧 법이었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위엄과 파워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세계의 주인이 되었음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승리와 권력에 취하지 않고 극도로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공화주의적 정신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로마인들은 황제(군주)란 존재는 낯설고 거북했다. 공화정을 자랑으로 여기는 로마인들에게 동방 전제 군주의 모습을 한 리더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로마의 전통적인 가치와 로마 엘리트들의 지배적인 사상은 그리스 스토아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정의, 용기, 절제, 지혜, 이 네 가지는 실용적이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미덕으로 로마인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공화주의 정신의 핵심이었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로마인들은 진지함, 엄격함, 공무와 세속적 지혜, 공공의 미덕을 위한 용기와 명예에 대해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로마인들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황제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을 속이기로 작정했다.
자신의 치세 기간 동안 제정 체제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놓지 않으면 언제든 공화정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로서 첫 단추를 제대로 채우는 일은 정복 사업보다 더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될 중요한 책무였다.
원로원이 자신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그럴싸한 연기력이 필요했다.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한 두 번의 치열했던 내전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도 있는 과제였지만, 젊고 신중한 황제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있었다. 바로 그의 숨겨진 재능인 '영리함'과 '모호함'이었다.
황제는 왕관을 쓰지 않았고, 황궁의 생활과 행차 등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검약한 인상을 주도록 세심하게 살폈다. 조금이라도 군주의 느낌이 나거나 그런 이미지로 비칠 소지가 있는 언행들은 최대한 자제하면서 자신의 속셈을 영리하게 감추었다.
존엄한 황제는 영리하게도 제1시민(프린켑스)이라는 호칭을 창안했다. 공화정 시대처럼 매년 형식적으로나마 황제의 파트너가 될 집정관과 함께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다. 원로원이 자신의 권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도록 적절하게 그들을 존중했고, 여전히 공화정 체제에 머물러 있다고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원로원은 애매하고 곤란한 상황에서 자신들이 속아 줄 명분을 황제가 알아서 제공해 주는 것에 오히려 감사할 정도였다. 일부는 믿는 척했고, 일부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황제의 가식과 기만을 진심으로 믿고 싶어 했다.
영리함과 모호함, 이 두 가지는 필요한 시점에 황제 스스로도 속아 넘어갈 정도로 알맞게 발휘되었고, 원로원 또한 황제 못지않은 연기력으로 응수해 주었다.
이 덕분에 아우구스투스 41년 제위 기간 동안 후대의 계승자들이 500년간 버틸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졌다. 똑똑하지 못한 황제들의 출현 시에도 부족함을 메울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창안하고 시스템을 완비했다. 혼란과 충격에도 제국이 쉽게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체질로 변모시켰다.
황제와 원로원 간 밀당을 통한 모호한 밀월관계는 후대의 계승자들에게 오래도록 이어졌다.
많은 능력들을 소유한 아우구스투스는 상황에 따라 필요한 특기를 끄집어내어 사용할 줄 알았다. 원로원과 타협이 필요한 시기에는 총명함 보다는 영리함이, 신중함보다는 모호함이 어울렸다.
이 두 가지 재능 덕분에 제위 기간 중에는 황제의 또 다른 특기인 냉혹함과 잔인성이 억제되면서 정치보복과 숙청이 크게 줄어들었다.
로마에서 황제의 연기력으로 포장된 겸손함이 칭송을 받는 사이 속주에서는 황제를 신격화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황제의 권위와 안전은 황궁보다는 속주와 군대에서 나온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찰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후대 여러 황제들이 근위대에 암살당하고 병사들의 추대로 등극되는 비극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