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인들은 인간 본연의 폭력성과 쾌락의 끝이 어디인지 끊임없이 확인해 보고 싶어 했다.
로마의 드높은 영광과 신들의 은총이 자신들의 잔혹한 폭력과 퇴폐적인 향락을 언제까지나 덮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 때문인지 다른 시대처럼 폭력을 애써 정당화하거나 탐욕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쾌락의 문화가 공화주의적 정신이 약해진 황제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노골화된 반면, 폭력 본능은 건국 초기부터 제정 시대 마지막까지 로마 역사 전반에 걸쳐 억제된 적이 없었다.
로마 병사들의 군 복무기간은 25년이었다. 공화정 시대 연례행사처럼 치른 빈번했던 전쟁을 감안하면 로마 남성들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죽음의 공포와 살상의 참혹함 속에서 보냈다.오랫동안 폭력에 과도하게 노출이 되면 무뎌지거나 능숙해지기 마련이다. 로마인들의 경우는 이 두 가지 모두 해당되었다.
당시 로마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문명사회였지만, 주변 야만족들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엽기적인 악습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노예와 포로들은 비참하고 치욕적인 죽음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고,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가족에 대해 가장의 판단으로 처벌(심지어 처형까지)이 가능했다.
정적 제거나 개인의 복수를 위해 백주대낮 로마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살상 정도는 헤드라인 뉴스에 실리지 못했다. 원로원에서 23곳의 칼침을 맞고 쓰러진 카이사르의 암살을 제외하면 유명 인사들이나 황제가 암살당하는일은 당시로서는 그다지 큰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내 부족 국가들은 수 백 년간 수많은 전쟁을 치른 뒤에야 통합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군인들 간 전투에서 벌어진 살상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에게도 살육, 고문, 강간, 약탈 등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끔찍하고 잔인무도한 폭력들이 가해졌다.
물리적 통합으로 같은 로마 시민이 되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철천지 원수였다. 희박한 동족 의식과 조상 시대의 원한 관계는 분쟁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법과 타협보다는 주먹과 칼이 앞서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로마인들이 원래 폭력적 성향의 유전 형질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내외부적으로 폭력을 조장하는 환경에 둘러 쌓여 있었고, 폭력 사용이 불가피했다는 명분을 얻을만한 조건들이 많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몇 가지 사례들
로마 시대의 폭력은 볼거리(오락, 선전)와 본보기(공포, 경고)를 위한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폭력은 전쟁터와 콜로세움, 포룸(광장)과 좁은 골목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매우 잔인하고 파괴적인 방법으로 자행되면서이 두 가지 목적을 충족시켰다.
상황에 따라서는 대중들에게 폭력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킬 필요가 있었다. 고문, 살인, 처형 등에 온갖 잔혹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공포심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로마여행의 필수 코스인 콜로세움이 잔인한 오락을 제공했던 대표적인 장소였다면, 로마의 심장인 포룸 로마노에 있는 로스트라 연단은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공화정 시대 정치보복으로 처형된 수많은 시체들이 연단 위에 쌓였고, 수 십 개의 잘린 머리들이 난간에 걸렸다.
기독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는 약 250년간 계속되었는데 온갖 참혹한 고문과 처형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맹수들에게 물려 죽이고, 화형을 시켜 야외 연회를 밝히는 인간 횃불로 삼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탄압의 강도가 극심할수록 순교의 가치는 높아졌고, 전파속도는 훨씬 더 빨랐다.
속주 한 도시가 로마에 반기를 든 적이 있었다. 화가 난 총독은 주모자 몇 명을 처형하는 정도로 끝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축제를 미끼로 경기장에 수 만 명을 불러 모은 뒤에 무장한 병사들을 풀어 전원몰살시켰다.
이 시대 전쟁포로의 운명은 처형당하거나 노예 신세 둘 중 하나였다. 카이사르는 8년간의 갈리아 전쟁에서 100만을 죽이고 100만 명을 노예로 팔았다. 전쟁 막바지에는 포로 수 천명의 양손을 자른 다음에 갈리아 전역을 떠돌게 했는데, 이들이 지나는 마을마다 죽음보다 무서운 공포가 확산되었다.
참고로 카이사르는 개인적으로 검투사 양성소를 운영할 정도로 야만적 결투를 즐겼다고 한다.
십자가형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고통과 수치심을 안겨주는 처형 방법이었다.손발이 못에 박힌 상태에서 대략 천 번 정도 기절했다 깨었다를 반복하면서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이 때문에 사형수의 가족들은 집행인들에게뇌물을 건네며빨리 죽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동안에 채찍질을 세게 하거나,십자가에 매달린 상태에서 정강이 뼈를 부러뜨리면살아있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스파르타쿠스 노예 반란을 진압한 크라수스(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 3인 중 한 명)는 아피아 가도 양쪽으로 6천 명의 노예들을 십자가에 매단것으로 유명하다.
십분형은 명령을 어기고 후퇴하거나 도망간 병사들에게 내려진 가혹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 처벌 대상 병사들을 열 명 단위로 나누어 추첨을 했다. 당첨된 병사를 나머지 아홉 명의 병사들이 곤봉으로 때려서 죽였다.이 형벌 또한 크라수스 때의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당시 로마 최고 부자였던 크라수스는 파르티아와의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혔는데, 파르티아 왕은 돈 욕심이 많았던 크라수스의 입에 펄펄 끓는 금을 부어 죽였다고 한다.폭력에 풍자를 보태는 솜씨는 로마보다 한 수 위였다.
로마 이후에도 여러 시대에 걸쳐 수많은 폭력들이 자행되었음에도 로마 시대의 폭력이 더 주목을 받는 이유는 폭력이 영광 뒤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영광과 함께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