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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Sep 01. 2022

위로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힘들고 지칠 때 위안이 되었던 을 기억하는가?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넬 때 어떤 말을 하는가?


절망에 빠질 때는 부모님이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다. '괜찮아,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하시며 밥상을 차려 주시는 어머니, 자식이 약해질까 봐 말씀을 삼키시며 애써 담담한 척하시는 아버지. 힘들 때는 부모님 앞에서 잠시 예전의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


아내의 따뜻한 손이나 남편이 말없이 안아줄 때도 큰 위로가 된다. 때로는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이 모든 근심을 한꺼번에 날려버리기도 한다.

말없이 어깨를 툭치며 미소 한방 날려주는 동료, 어떻게 알았는지 한잔하자며 전화를 걸어오는 친구.. 우리는 이들과 함께 위로를 받고 위로를 하며 살아간다.


이들이 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의 상처를 씻어 주지는 못하더라도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고, 공감을 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하지만, 때로는 위로하는 사람의 의도와 다르게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하거나 더 힘들게 할 때도 있다.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어설픈 동정, 훈계가 되어버린 조언,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라며 남의 속도 모르고 '유리 멘탈' 취급하는 핀잔, 나보다 더 슬퍼하며 오버하는 동료는 불난 집의 기름이다.

공부와 담쌓은 자식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한테 '요즘은 공부 못해도 다 먹고살아요'라는 말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시댁 험담에는 맞장구를 쳐주더라도, 남편과 자식 험담에는 맞장구 대신에 덕담을 해줘야 한다.


모든 위로의 말은 모두 좋은 의미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위로에도 신중함과 테크닉이 필요하다. 위로의 말들 중에 자칫 독이 되는 말도 있다.

'너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힘내라. 그 사람들에 비하면 너는 행복한 편이다' 대표적인 위로의 말이다. 나도 이 말을 자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지금은 애한테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다.

이 말의 의미와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위로의 말이다.


왜 그럴까?


우선 이 말을 들으면 '나 보다 못한 사람들'을 떠올려야 하는데 그 대상이 모호하다. 자산의 규모 기준인지, 신체적 건강, 아니면 마음고생이나 괴로움의 정도인지.. 비교 대상과 기준이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물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종합적인 상황이나 조건을 따져 봤을 때, 누가 보더라도 현실적인 기준(혹은 비교하고 싶은 기준)에서 뭔가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이러한 위로의 말을 들으면, 순간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먼저 생각나는가?

내가 직접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나보다 부족한 사람들을 떠올리는지, 아니면 평소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딱한 처지의 사람들을 떠올리는가? 이것도 아니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틀에 박힌 이미지를 연상하는가?


이들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조금 부족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조금 위로가 되고, 많이 부족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많은 위로가 된다는 불편한 논리를 성립시키게 된다. 비교 대상에 따라 위로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결국 '나 보다 사람들'이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깨닫게 된다.


아프리카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인도의 슬럼가, 재해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위로를 얻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들을 통해 위로를 얻는 데 성공한다면 평생 위로를 받으며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 불쌍한 사람들'은 위에 언급한 지역이 아니더라도 세계 곳곳에서, 우리의 주변에서 정도만 조금 다를 뿐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결코 진정한 위안을 얻을 수 없을뿐더러, 설사 위안이 된다고 해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한다.



다음으로는 이 위로의 말이 누군가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문제다.

아래쪽과 비교해 위안을 얻으면 반드시 위쪽과 비교해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게 되어 있다. 이것은 절대 피할 수가 없는 필연적인 과보이자 괴로움의 악순환이다.


일반적으로 위로를 목적으로 하는 비교대상은 나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이나 극한 상황에 내몰린 불행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대체로 내가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범위 내(혹은 인터넷이나 TV에서 본)에서 상대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나, 나와 약간의 차이로 덜 힘들거나 조금 더 힘든 사람들을 주로 비교한다. 나와 가까운 사이일수록 비교는 더 자주 일어나는 법이다.

 

누군가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 위안을 얻는 것은 술로 잠시 괴로움을 잊어보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약발이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그리고, 비교를 하는 습관이 들어 버리면 매사에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며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게 된다.


상황은 계속 바뀐다. 비교의 대상이 고정된 것도 아니고, 비교 대상이 가지고 있는 조건과 상황도 계속 변한다. 주로 가까운 사람들 중에 비교의 대상을 찾게 되는데, 분명 나 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부모님으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다든가, 나보다 먼저 진급을 해 버리면 어제의 위안거리가 오늘의 괴로움으로 돌변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위안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나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물질적인 조건이나 신체적 결함 여부 등으로는 행복의 척도를 판단할 수는 없다.

무슨 수로 행복의 기준을 함부로 정하여 나보다 낫다, 못하다를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비교당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우리 모두 누군가의 비교대상이나 위안거리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때, '너보다 못한 사람들'로 시작하는 은 가급적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누군가와 비교를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하는 마음도 버려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비교는 괴로움을 유발하는 가장 치명적인 마음 작용이다.


내가 지은 인연에 대해 내가 책임지고 감당한다는 자세가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 비교를 통한 위안 따위는 필요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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