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존심 상하는 것은 둘째 치고, 맞추고 싶어도 상대의 성향과 기분을 제대로 파악하기 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비위를 맞출 능력이 있다면야 신성한 밥벌이를 위한 일인데 까짓 거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올해 들어 직장생활 27년 차에 접어들었다. 갓 입사했을 당시 회사를 5년만 다니고 여행 작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나의 근사한 꿈은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그동안 회사를 두 번 옮겼고,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18년째 장기근속 중이다.
지금까지 안 쫓겨나고 꿋꿋하게 버틸 수 있는 것도 사람들의 비위를 그런대로 맞추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처세에 뛰어나다거나 남들 이상으로 대인관계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상사의 눈 밖에 벗어나 심각한 위기를 몇 번 겪기도 했고, 난해한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나의 약한 맷집은 늘 아슬아슬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그저 내 능력으로 할 수 있을 만큼의 노력으로 사람들과 융화하며 근근이 버텨 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직장인들도 나처럼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가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상사와의 갈등으로 어렵게 얻은 직장을 조기에 떠나기도 한다. 물론, 상사의 비위를 맞추지 못해 혹은 맞추기 싫어서 중도 하차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를 기준으로 보면 지금은 예전만큼 이직률이 높지 않지만, 여전히 상사와의 갈등이나 동료들과의 불협화음 때문에 이직을 고려하는 후배 직원들을 더러 만난다. 일보다 상사나 선배 직원들의 비위 맞추기가 가장 힘들다는 말을 들을 때면 안타까운 마음에 간곡히 조언을 해주고 싶다.( 아래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에 기반한 것이며, 직장 내 복잡다단한 대인관계의 여러 사례들에 모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비위를 맞추겠다는 생각부터 버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상대의 마음을 기가 막히게 잘 파악해서 그 기분을 맞추는 것은 고수들만이 할 수 있는 고난도의 경지다. 괜히 어설프게 흉내 내다가는 몇 푼 안 되는 본전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
비위를 맞추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상사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욕심이 앞서면, 지나치게 상사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렇게 되면 노예근성이 발동하여 스스로 비굴해지기 쉽다.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면서 밝은 표정과 긍정적인 마인드를 잘 유지한다면 상사의 비위를 굳이 맞추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상사들 또한 눈앞에서 웃는 얼굴에 당장은 호감이 가겠지만, 알맹이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직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 조직이라면 결국에는 소신과 능력을 갖춘 직원이 살아남아 상사가 된다.
다음으로는 직장 내에서 나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상사와 동료들 또한 당신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부족한 업무 능력과 잦은 실수에 대해 상사가 약하게 지적하는 것은 당신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신의 까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이 당신과 같이 어울리는 것은 당신의 비위를 맞춰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당신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당신의 언행이 완벽해서가 아니다.
나 또한 상사들과 여러 동료들이 나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춰 준 덕분에 그럭저럭 버텨온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연식이 꽤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고, 비로소 두려움과 비굴한 기분이 동시에 사라졌다.
끝으로,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관점에 따라 더럽고 치사한 행위일 수도 있고 정반대일 수도 있다.
성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조직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려면 리더의 지휘에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팀원들이 서로 호흡을 맞춰가려면 조직의 융합과 목표 달성에 저해되는 성질은 회사에서는 잠시 숨겨야 한다. 회사는 수익을 내야 하고 나는 밥벌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사는 친목 도모나 동호회 모임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집단이다.
물론, 정말 악랄한 상사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난이도 있는 연습을 하는 셈 치고 연기하듯이 일단 상사와 코드를 맞추려는 노력을 해 보기 바란다. 그렇게 했는데도 도저히 아니다 싶으면, 용기를 내어 인사부서와 상담을 통해 다른 부서로 이동할 수도 있다. 이직은 가장 마지막 단계에 신중하게 고려할 사항이다.
지난 2년간 지방 작은 도시에서 파견 근무를 하는 동안, 고객 중에 3040세대 귀농인들을 여럿 만났다. 그중 몇 명은 직장에서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가 힘들어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용기와 결단이 대단하지만, 한편으로는 직장 상사 대신에 까다로운 고객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녹녹지 않은 현실에 직면해 있었다.
수확한 과일 중 일부는 공판장에 내다 팔고 나머지는 본인들이 직접 발품을 팔거나 인터넷으로 판매하는데, 경쟁이 치열해 적기에 제값을 받고 팔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이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비위는 바로 자연이다. 자연이 주는 축복은 늘 경이롭지만, 때로는 변덕이 심해 기분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냉정한 자연의 비위는 술 한잔으로 갈등이 풀리던 직장 상사에 비해 훨씬 더 까다로워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예전처럼 억지웃음과 비굴한 모습으로 자연의 비위를 마음 졸이며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담담하게 순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