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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Nov 20. 2022

퇴근 후 소주를 마시는 한 가지 이유

초보 수행자의 작은 깨달음


한바탕 출근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무실로 들어온다. 아침잠이 모자란 얼굴들이 부숭부숭하고, 출근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는 안도의 표정들에서 분주했을 아침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얼핏 보기에는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처럼 지치고 기운이 없어 보이지만, 이들의 내면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지난밤 살을 맞댄 사랑하는 이의 체온이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있, 전날 퇴근 후 누군가와 마신 위로의 술기운이 오전 동안은 에너지가 되어 줄 것이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며 눈에 담은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은 이들에게 하루를 시작하는 분명한 이유가 되어 준다.




오후가 되면서 오전의 반짝거리던 활기는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워지고, 일을 해야 하는 의무감마저 무뎌진다. 뇌의 움직임은 일시 정지되고, 관성에 따라 반복하 기계적인 몸동작뿐이다. 가느다랗게 깜빡거리던 배터리의 눈금 퇴근이 임박하면 왼쪽 끝에 처박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텅 빈 공간은 잠시 진공상태가 된다.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눈치를 보고 있던 각종 부정적인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오려고 기웃거린다. 

빨리 가족들을 만나 새로운 기운을 충전해야 한다. 하지만, 퇴근길은 출근길과 달리 멀고 거친 여정이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부정적인 생각들의 침입을 받을 게 뻔하다.


나는 바로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나의 존재감을 보여줄 최적의 타이밍이 된 것이다. 생기가 최고조에 달해 있는 오전 시간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들 의욕이 넘쳐난다. 남아도는 에너지를 서로 아낌없이 나눠주려고까지 한다. 내가 뭔가를 하더라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설사 약간의 보탬이 되어고마워할 사람은 거의 없다.


퇴근 후 동료들의 텅 빈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들이 주입되 도록 막아주는 것이 나의 중요한 역할이다. 퇴근길에는 아침 출근길에 보이지 않던 피로, 실망, 권태, 우울 등 온갖 비관적인 생각들이 들러붙는다. 출근 길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충전된 가족들의 사랑이 보호막 역할을 해준다.


퇴근 후 동료들을 무방비 상태로 집에 보내서는 안 된다. 며칠 버틸 정도는 못되더라도 집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에너지 정도는 내가 충전해줘야 한다. 나 또한 동료들로부터 에너지를 충전받는다.


이것이 내가 퇴근 후 동료들과 소주를 마셔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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