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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Feb 12. 2023

팔자소관도, 운명도 아닌 인연(因緣)의 실체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


이선희는 남녀노소 모두의 감성을 자극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이선희의 수많은 히트곡 중에서 '인연'과 '그중에 그대를 만나', 이 두 곡은 오래전부터 내가 가장 즐겨 듣는 노래다.

혼자 운전을 할 때는 볼륨을 높여 반복해서 듣는다. 맑은 고음에 실린 가사말이 깊은 울림이 되어 차 안을 가득 채운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감성이 풍부해진 '문학 중년'의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아내가 옆자리에 있을 때는 이 두 노래는 틀지 않는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인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나와 아내는 과연 어떤 인연으로 만나 지금까지 같이 살아가고 있을까? 노랫말처럼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대를 만나' 20년 이상 같이 살고 있으니 간단한 인연이 아님에는 분명하다. 


좋은 인연은 인연이라고 부르지만, 나쁜 인연은 인연이라고 하지 않는다. 나쁜 인연은 팔자소관이나 운명으로 분류해 버리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을 운명이란 표현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팔자소관이나 운명이라고 부르는 현상들도 결국에는 인연의 법칙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인연은 나의 의지가 반영된 인(因 )과 외부의 조건인 연(緣)의 결합에 의해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국민 애창곡 노사연의'만남'에 이미 답이 나와 있다.'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인(因)이 나의 재능, 노력, 의지, 판단, 결정, 행동 등이라면, 연(緣)은 가족, 학교, 이웃, 국가, 친구, 동료, 직장, 날씨 등 나를 둘러싼 외부의 모든 환경과 조건들이다. 

나의 인이 외부의 연을 만나 인연을 만드는 과정과 결과물이 바로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내가 외부의 연(緣)을 만나지 않으면 인연이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연(緣)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연의 결과는 달라진다. 콩 심은 데 팥 나지 않고, 팥 심은 데 콩 나지 않는 법이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의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온갖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인과 연의 과정이 명확하지 않거나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원인을 찾으려고 과거의 사소한 일들과 잠깐 스쳐 지나간 의미 없는 대화들까지 곱씹는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생긴 것일까? 원인을 찾지 못하면 하늘을 원망하고 절대적인 존재에게 두 손을 모으기도 한다. 경전을 뒤적거려 보지만 참회하라는 글귀뿐, 그럴듯한 답을 얻지 못한다.


결국에는 자신의 불운한 팔자를 탓하고, 체념한 채 운명에게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인연을 우연히 발생하는 요행, 불운, 신비, 기적 등과 같은 원인불명의 영역으로 인식하는 한 괴로움을 피하기 어렵다.



불교에서는 이런 불가사의한 일들도 결국은 인연의 법칙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삼라만상 모든 사물과 현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과 연의 결합과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인과의 법칙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이며, 인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부처의 경지까지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인(因)과 외부의 연(緣)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그 과정을 조금이나마 이해(깨달음)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괴로움이 덜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연 결과의 원인을 알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원인을 모르면 온갖 쓸데없는 추측과 상상이 개입되어 괴로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내(因) 잘못이라고 자책하거나, 지나치게 남(緣) 탓만 하게 되어 마음의 병은 더 깊어진다.


불의의 사고 또한 그 원인을 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난 차이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과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평생 동안 원인규명에 나서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책임자 처벌과 보상만이 목적은 아니다.


둘째, 가장 흔히 하는 실수로 잘못의 원인을 연(緣)에서만 찾으려는 것이다.

물론, 잘못의 원인이 나 때문수만은 없고, 나만 잘한다고 해서 만사가 형통한다는 보장은 없다. 문제는 인과 연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남 탓에만 익숙해져 있는 잘못된 인식이다.


한편, 공정하지 못한 시스템이나 사회적 편견, 천재지변 등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환경과 조건이 원인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이런 경우는 연을 극복할 더 나은 방법을 찾거나, 연을 바꿀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가지 모두 소용이 없다면 지금의 연을 피해서 새로운 연을 찾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것이나, 프랑스 국민들이 루이 16세를 처형한 것은 역사적으로 연(緣)을 바꾼 중요한 사례들이다.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집단 지성이나 사회적 연대를 통해 얼마든지 연을 바꿔 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연을 바꾸는 시도가 늘 성공하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울고 불며 기도를 해도, 세상이 들고일어나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더라도 두려움 때문에 혹은 손해를 보기 싫어서 연을 바꾸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남들이 만들어 놓은 노예 같은 인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먼저 나의 인(因)부터 닦으며 내게 맞는 다른 연(緣)찾는 판단력을 키워야 한다.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테스형의 충고를 기억하자).

인연의 법칙을 알면 내가 걸어온 길이 보이고, 상대와 주변이 또렷하게 보인다. 인과의 결과만으로 시비를 판단하지 말고 인과의 전후 관계를 지혜롭게 살펴봐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인연은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연은 훌륭한데 인이 부족해 인연을 맺지 못하는 경우다. 복을 자기 발로 걷어차는 사람들로 잘못의 원인을 연으로 돌리며 괴로움 속에서 살아간다.


다른 하나는, 주어진 연의 크기에 맞는 인을 경우다. 바로 우리가 덕담을 건네 좋은 인연다. 부부로 치면 찰떡궁합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성공의 원인을 인으로만 생각한다면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는, 비록 주어진 연은 부족하지만 끊임없이 인을 갈고닦아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경우. 개천에서 나온 용이 여기에 해당된다. 설사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결코 인과 연 어느 쪽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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