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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Feb 27. 2023

초보 정원사가 준비하는 옥상 정원


한낮의 기온이 제법 따뜻하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얼마나 먼데, 겨우 23.5도 기울어진 자전축 때문에 날씨가 이렇게 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불평이 아니다. 너무 반가워서 하는 말이다. 난방비 폭탄을 연속으로 맞고 있는 지금, 봄기운은 더없이 반가운 존재다. 무엇보다 근무지를 옮긴 후에도 화단을 다시 가꿀 수 있게 되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한껏 들뜨고 온몸이 근질거린다.



나는 2년 전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파견근무를 하는 동안  좋게도 화단을 가꿀 기회가 생겼다. 지점 건물에 달린 화단과 텃밭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방치된 노지 상태였다. 주말부부를 하던 터라 주중 독거인은 퇴근 후에 시간이 남아돌았다. 화단을 가꾸기에 최적의 환경과 조건이었다.

노지 개간, 모종


어느 봄날 나는 갑자기 마음이 발동하여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화단 가꾸기에 도전했다. 씨앗, 모종, 농기구, 비료, 농약 등 구입해야 될 물품들이 계속 늘어났다.

황화 코스모스, 고구마, 리빙스턴데이지

인터넷을 뒤지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며 몇 개월간의 노동으로 마침내 근사한 화단이 완성되었다. 서툴고 고된 일었지만, 난생처음  손으로 직접 화단을 가꾸면서 말로 다하지 못할 보람과 희열을 만끽했다.



2년간의 지방 근무를 마치고 수도권 지역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그동안 나의 땀과 정성이 고스란히 담긴 화단과 작별하는 것이었다. 퇴직 후 귀농할 때까지는 손에 흙을 묻힐 기회가 다시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연의 끌어당기는 힘은 강력했다. 새롭게 부임한 지점의 건물 옥상에는 놀라운 선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공으로 조성된 큼지막한 화단이 옥상 한가운데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건물 옥상 화단

마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했다. 화초 한 포기 재배할 틈조차 찾기 어려운 도심 콘크리트 숲에서 이 보다 더한 축복은 없었다.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게 더 남아 있으니 계속 화단을 가꿔 보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았다.



지난 2년간 화단을 가꾸면서 많은 종류의 화초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화초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에 순응할 줄 아는 유연함과 끈질긴 생명력은 경이로웠다. 흙과 물, 햇볕이 만나는 곳이면 어디든 자연의 신비와 오묘함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세상의 이치와 순리따라 살아가려면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조금이나마 얻은 것 같았다. 흙에 친숙한 나의 감춰진 기질을 발견하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아래는 지난 2년간 화단을 가꾸면서 틈틈이 기록해 놓은 글들 중 일부다. 초보 정원사로서 자연에 대한 사색이 주로 담겨 있다.


"10년 이상 방치되어 있던 도로변 퇴비더미 구역부터 개간했다. 가지치기한 나뭇가지들, 옆 텃밭에서 버려진 호박과 고구마 줄기들, 온갖 잡초들과 화초 덤불들로 뒤범벅이 되어 막대한 양의 퇴비가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다. 퇴근 후 짬을 내 치우다 보니 화단의 구색을 갖추는데만 며칠이 걸렸다. 오랜 기간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음습한 공간이 햇볕 아래에서 새로운 호흡을 하며 변신을 준비한다"  


"식물들도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무리를 지어 생활하고 싶어 한다. 혹독한 자연환경을 견뎌내는 것도 혼자가 아니기에 가능할 것이다. 무리 지어 꽃을 피울 때 훨씬 더 보기 좋다는 것도 진화를 통해 스스로 터득했을 것이다.

때로는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버티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힘을 얻것이다. 노지 월동하는 화초들처럼 일단 조금 더 버텨보는 거다"


"뿌린 만큼 거둘 수만 있어도 엄청난 행운이고 감사할 일이다. 아니 어쩌면 '뿌린 만큼' 욕심일 것이다. 그저 자연이 주는 대로 '거둔 만큼'에 만족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일지도 모른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던 뜨거운 여름은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하고, 퇴근 무렵 먼 서쪽하늘의 노을은 가을이 머지않았음을 알려준다. 애를 쓰지 않아도 지나갈 것은 지나가고,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



겨울의 끝에서 올해 화단 가꾸기 시즌2를 준비하는 초보 정원사의 코끝에 희미한 흙냄새가 와닿는다. 봄이 오면 옥상 정원은 오래동안의 침묵에서 깨어나 형형색색의 화려한 화초들로 가득 찰 것이다.

지난 시즌1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아프리카봉선화를 첫 번째 가족으로 데려와야겠다. 초겨울 서리에도 꼿꼿하게 잘 버티는 노지월동 국화도 빠질 수는 없다.

올해 옥상에서 마주할 자연은 내게 어떤 가르침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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