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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Mar 20. 2023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들


한동안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음악에 대한 경험과 지식은 많이 부족하지만, 여러 참가자들의 노래들을 비교해 들으면서 심사위원이 된 듯한 기분까지 덤으로 만끽할 수 있었다.


예선을 거듭할수록 살아남은 자들의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노래에 단련된 참가자들도 타이트한 일정 속에 매주 경연곡을 소화하기가 벅차보였다. 음정, 박자, 기교 등 기본기 외에도 선곡과 컨디션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여러 평가 요인들 중에서도, 자칭 안방 심사위원인 내가 보기에, 기본기가 탄탄한 상위권의 순위 싸움은 심사하는 사람들의 감성을 누가 더 많이 자극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고음 위주의 가창력이든 호소력 짙은 감성이든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청중들을 감동시킬 한방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마다 감동의 비등점이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노래에 담긴 진정성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다만, 가수가 무대 위에서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쏟아내면 관객들이 받아야 할 감동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애절한 곡조에 가슴 아픈 사연을 담아 노래를 하더라도 한 발짝 물러나 담담하게 불러 청중들이 더 크게 감동을 받는다.


한편, 작곡가는 가수보다 감정을 더 억제하는 위치에 있다. 작곡가는 곡의 시작과 끝을 설계하고 통제하는 사람이다. 곡을 쓰면서 느끼고 경험한 온갖 감정들과 창작의 고통이 악보 속에 그대로 응축되어 있다. 자신의 의도를 모두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가수가 가진 고유의 감성대로 곡을 해석하고 소화하게끔 공간만들어주려는 것이다.

작곡가는 어디에서 높여야 하는지, 어디에서 감정을 숨겨야 하는지 제어할 줄 안다. 그렇게 해서 사연이 보일 듯 말 듯 한 감정의 굴곡을 만든다. 이 창작의 과정에서 작곡가는 눈물을 참는다. 청중의 몫으로 남겨 놓기 위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글을 쓰는 작가도 작곡가와 비슷한 입장이다. 작가가 자신의 말과 감정을 너무 많이 쏟아내 버리면 글을 읽는 사람들의 감동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작가의 친절하고 상세한 표현이 오히려 독자들 스스로 사유하는 공간을 좁게 만든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가져가야 할 몫을 작가가 움켜쥐고 있으면 공감을 하기가 어렵다.


작가는 작품의 스토리와 주인공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창작이든 실화든 주인공이 겪어야 할 온갖 시련과 고난은 작가 본인이 만든다. 소설의 시작과 결말을 만들고 주인공이 맞이할 운명도 작가가 책임진다.

때로는 가슴 아픈 사연을 문장 속에 어렴풋이 숨기고, 세상을 향한 외침을 마침표에서 멈출 줄 안다. 작가가 감정을 억제하고 눈물의 흔적을 문장에 남기지 않는 이유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놓기 위함이다.


영화감독도 마찬가지다.  컷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장면들을 반복 촬영하고, 끊임없이 필름을 되감아 본다. 이 과정에서 감독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상상 속에서 관객들과 밀당을 한다. 화면과 대사에 감독의 의도가 지나치게 드러나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다.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의 작업을 다듬어 2시간짜리로 응축시킨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배경 화면으로 짧게 처리하고, 보여주고 싶은 장면들은 배우들의 표정에 살짝 담는다. 압축하고, 삭제하고, 대체한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통제하는 감독은  담담하다. 감동은 관객의 몫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힘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비로소 내 삶을 스스로 창작하고 연출하게 되었다. 가수로 치면 작사 작곡을 겸한 싱어송라이터다. 내 얘기를 글로 써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작가이자, 내가 쓴 대본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이것으로 내가 담담하게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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