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원 Apr 07. 2023

나의 천수답 글쓰기


비가 내리는 날이면 정원사들은 화초들보다 먼저 일어나 움직인다. 일기예보를 믿고 일찌감치 잡아 놓은 휴가 날짜에 정확하게 비가 내려주니 더할 나위 없이 고맙고 반갑다.


시원한 빗길을 한 달음에 달려 도착한 화훼단지에는 간밤에 잠을 설쳤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비가 내린 뒤 아침 기온이 다시 떨어진다는 소식에 우선 몇 가지 모종들만 구입했다. 빗물을 흠뻑 머금은 화단 중앙에 핑크키세스 카네이션이 자리를 잡자 옥상 정원에 가족이 하나 더 늘어났다.

옥상 정원

모종의 양이 많지 않아 예상보다 일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오후 시간이 통째로 비었다. 자주 오지 않는 평일 낮유를 낮잠으로 때울 수만은 없었다. 노트북과 얼마 전 구입한 책 한 권을 챙겨 한적한 카페를 찾았다. 오전에 받은  취기에서 깨어나기 전에 몇 자 끄적여 보려 했지만, 비 내리는 바깥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터라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비가 내리는 날이어린 시절 부모님의 천수답 농사 생각이 난다. 얼마 되지 않은 경작지는 화천과 저수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있었다. 해발이 높은 산중턱에 위치해 주로 빗물에 의존해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장비나 인프라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가뭄이 길어지면 온 집안 식구들이 동원되어 하루종일 물을 퍼 날라야 했다.


천수답!

나의 글쓰기는 빗물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천수답 농사를 많이 닮았다. 어쩌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희미한 생각을 붙잡아 이리저리 살을 붙여 겨우 글 한 편을 완성한다. 어떤 날은 몇 가지 영감들이 한꺼번에 떠오를 때도 있지만, 평소에는 늘 심한 글감 가뭄에 시달린다.

며칠 째 제목만 쳐다보고 있을 때면 한 번도 글을 써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무뎌져 있는 나의 감각에 크게 실망한다. 이런 날은 기우제를 지내는 천수답 농부의 막막한 심정으로 하늘만 멍하니 쳐다본다.  


천수답 글쓰기의 한계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우물을 팔 줄 알아야 한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여러 개의 우물을 파 놓고 옮겨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물을 길어 마신다. 이들은 타고난 상상력과 문학적 소양을 겸비하여 웬만한 가뭄에도 우물물이 마르는 일이 없다. 출판사와 독자들이 원하는 일정에 맞춰 정기적으로 글을 생산해 낼 수 있는 내공을 갖춘 작가들이다.


단계에 미치지 못한다면 관개용수를 이용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양수펌프를 장만하든가 수로를 만들면 집 입구까지 물을 끌어올 수 있다. 다독, 다상량, 다작이 저수지나 화천의 물을 운반해 줄 관개수로의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전문 작가의 코칭을 받거나 스터디 모임 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도 관개용수 글쓰기에 해당된다.   

이 상태가 되면 수로를 따라 늘 일정한 양의 물이 흐른다. 물을 한 바가지 퍼다가 자신의 구상과 기획을 입혀 글의 기본 틀을 만들 수 있는 단계다.



최근 나는 천수답 글쓰기에 지쳐있다. 답답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니 산 너머에 큰 저수지가 하나 보이고 멀리 떨어진 곳에 수량이 풍부한 화천이 흐르고 있다. 양수펌프를 구입할까 관개수로를 건설할까 고민을 해 보지만, 아직은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천수답 글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심이야 넘치지만, 과연 직장생활과 병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천수답 글쓰기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얼핏 보면 순탄해 보이지만 변화와 굴곡이 적지 않았던 내 삶의 이야기를 글에 담으려면 어쩌다가 한 번씩 내리는 빗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의욕이 약해지기 전에 양수펌프를 구입하든가 수로를 건설해야 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