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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내리지 못한 존재

떠도는 삶, 뿌리내린 삶

by 담서제미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모래가 먼지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막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발걸음을 내딛자 발밑에서 모래가 무너졌다. 나는 어린 왕자가 걸었던 그 길을 순례자처럼 걸었다. 애당초 아무것도 없는 듯한 이곳에도 생명은 자라고 있었다.


"안녕"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안녕"

꽃이 대답했다.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사람들은 바람을 따라 떠돌아다녀. 그들은 뿌리가 없어. 그래서 아주 먼 곳을 하염없이 떠돌아"


하염없이라는 말이 왜 이리 마음 안에 깊숙이 박히는지. 어쩌면 나도 한때 그런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 말은 내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떠돌던.


이제 나는 치열한 삶에서 한 발 물러나 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내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전보다 훨씬 더 줄어들었다.


내 뿌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뿌리가 없다는 건, 어디나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에도 머물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한다.


젊었을 때는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삶이 멋있다고 여겼다. 여행하는 삶, 모험을 떠나는 삶, 카멜레온처럼 늘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삶, 어디든 가방 하나에 삶을 담고 떠나는 날들을 동경했다.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도시. 늘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진보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종종 되묻는다.

'단 한 곳이라도 제대로 뿌리를 내린 적이 있었던가?'


나는 꽃에게 물었다.


"너는 왜 여기에 있어"

"나는 이곳에 머물기로 했어. 이곳에 내 뿌리가 있기 때문이야. 누군가 너처럼 또 올지도 모르잖아."


그것은 사랑이었다. 가장 오래된 기다림의 언어로 옷을 갈아입은. 사람들은 언제든 지 떠날 수 있게 뿌리를 없앴지만 사막에서 자란 꽃은 아직도 뿌리내릴 누군가를 믿고 있었다.


세 번째 스무 살을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처음으로 나의 시간이 생겼다. 하지만 한동안 그 시간 속에 온전히 머물 수 없었다. 시간은 낯설었고, 그것은 또 다른 감옥이 되기도 했다. 불현듯 불안이 밀려왔다. 문화센터, 국악원, 행정복지센터에서 하는 모든 프로그램을 찾아다녔다. 나는 머무는 법을 잃어버린 채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이름 없는 꽃 한 송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인가를 찾아 움직이는 건 습관이지만 머무는 것은 용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 익숙해서 미처 알지 못한 바쁨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득 채운 것처럼 여겼지만, 그것은 공허를 감추기 위한 허울이었다.


이제야 나는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하루를 온전히 집에서 보내기. 오래오래 창밖 바라보기, 대화반복하기. 그 단순함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꽃이 사막에서도 피어나는 것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내릴지 모를 비를 기다리며 그 자리에 자신을 맡긴다. 맡긴다는 건 마음이 그 자리를 잉태했다는 뜻이다.


떠도는 삶이 아닌 한자리에 오래 머문다는 건, 뿌리를 내려 단단한 둥지를 만드는 일이다. 폭퐁이 몰아쳐도, 비바람이 닥쳐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때로는 무너지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제 자리를 지켜내는, 어쩌면 그건 거룩한 일이기도 겁이 나는 것이기도 하다. '바람처럼 살고 싶다'는 말의 이면에는 어쩌면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할 까봐 두려운 마음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꽃에게 말했다.

"고마워. 누군가 찾아오면 나를 반겨준 것처럼 반겨줘."


꽃을 만나고 온 이후 나는 내 삶의 한 구석에서 조용히 뿌리가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더 깊이 머물기 위해. 누군가 올지도 모를 그 자리를 지켜내며 오늘도 자리에 앉아 같은 노래를 듣고 어제와 비슷한 저녁노을 바라본다.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던 마음이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우리는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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